칼럼

[경향의 눈]북한이 남북관계에 기대를 접은 이유

서의동 2019. 11. 3. 22:20

2019.10.2

 

지난해 4월27일 판문점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수행한 리명수 인민군 총참모장 등 북한군 수뇌부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로 인사했다. 9월 평양정상회담 때도 인민군 위병대장이 “대통령 각하”를 외치며 문 대통령을 맞았다. 이젠 ‘이런 일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진다. 1년이 지난 지금 남북관계는 전면 중단상태다. 지난해 12월14일 체육회담 이후 당국 간 회담의 문은 닫혀 있고, 민간교류도 전무하다.

 

북·미 협상이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7개월 만에 재개된다. 하지만 협상이 성공하더라도 남북관계가 가슴 뛰던 지난해로 돌아갈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북한 조평통은 광복절 다음날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했다. 북한은 지난 몇 달간 험한 말들을 쏟아내며 지난해 남북관계의 기억을 지우고 있다. 북한은 왜 남북관계를 닫으려 하는 걸까.

 

먼저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를 담은 것을 화근으로 꼽을 수 있다. 하노이에서 북한이 제시한 영변카드를 미국이 퇴짜를 놓으며 남북관계에도 불똥이 튄 것이다. 영변카드를 평양이 아니라 하노이에서 꺼냈더라면 대북제재 완화를 대가로 받는 거래가 성사됐을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평양공동선언에서 영변을 포함시킴으로써 교착 중이던 북·미 협상의 모멘텀을 살려낸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평양공동선언은 양측의 합의인 만큼 한국 정부의 책임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남북 간 합의 이행에 대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이 더 커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이행되지 못하면 기대를 품었던 분들한테 낙심을 줄 것”이라고 했다. 과거 남북 간 수많은 합의가 휴지 조각이 돼온 전철을 밟지 말자는 다짐이다. 그러나 남북이 지난해 합의한 교류협력 방안 중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 외에 진척된 건 없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개성공단, 금강산관광도 재개될 전망이 요원하다.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피할 길이 없다는 사정을 들고 있다. 하지만 관광은 유엔 제재대상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유엔제재의 ‘벌크캐시(대량현금) 금지 조항’을 이유로 금강산관광이 어렵다고 하지만, 제재를 회피 또는 우회하는 현금지급이 문제일 뿐 현금지급 자체는 문제가 안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중국, 유럽, 일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북한에 대가를 지불하고 개별관광을 한다.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실마리는 풀릴 수 있다.

 

개성공단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가 2017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일방적 구두지시로 개성공단 중단이 결정됐다”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그에 맞춰 정부가 개성공단 중단조치의 원인무효를 선언하고, 재가동을 위한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제재문제가 까다롭긴 하지만, 한국 정부와 여론이 개성공단 재가동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발신할 필요가 있었다. 정부 초기부터 개성공단·금강산을 북·미 간 거래대상이 아닌 남북문제로 프레임을 짜야 했다. 민간교류의 물꼬도 과감하게 터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왕래와 접촉을 활성화하기로’(판문점선언) 합의한 뒤에도 방북 문턱을 낮추는 데 소극적이었다. 북한뿐 아니라 남북화해를 열망해온 시민사회도 대북정책의 ‘청중(audience)’임을 정부는 잊었는가.

 

그러는 사이 미국은 ‘워킹그룹’을 만들어 미국과 협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도록 했다. ‘대북 외교권’의 박탈이다. 남북 간의 접촉은 유엔사가 가로막고 있다. 미국이 남북관계 진전을 반기지 않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시절 당국자들은 미국과의 마찰을 불사해가며 독자적 정책공간을 확보해 나갔다. 문재인 정부에는 그런 ‘파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를 가로막아온 적폐와 결별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개성공단·금강산관광은커녕 북한식당 여종업원 납치의혹 사건조차 풀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정부가 대북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는 말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전쟁위험을 없애고, 북·미 대화를 궤도에 올려놓는 데 기여한 공은 아무리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북·미 중재역에 과도하게 매달리면서 남북관계를 북·미 협상의 디딤돌로 전락시킨 책임도 있다. 지금이라도 남북관계를 리부팅할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이전의 관성과 다른, 과감한 상상력과 지혜에 기반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