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F35와 금강산 사이, 문재인 정부가 할 일

서의동 2019. 11. 3. 22:27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6월30일 판문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한 50분 중 절반가량을 한·미 연합훈련 중단 요구에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의 집을 나서던 김 위원장의 표정이 밝아 보인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긍정적인 언질을 받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 달이 못돼 한·미 연합훈련이 실시됐다. 북한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지구를 현지 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쪽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북·미 비핵화 협상은 ‘쌍중단’(북한의 핵·장거리미사일 실험과 한·미의 군사훈련 중단) 원칙에 양측이 동의함으로써 출범했다. 봄철 한·미 연합훈련이 연기됐고, 김 위원장도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중단 방침으로 화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5개월 뒤 한·미 양국은 해병대 연합훈련을 횟수만 줄여 실시함으로써 ‘쌍중단’ 원칙을 흔들었다.

 

게다가 남북관계 복원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국방비를 역대급으로 늘리는가 하면 F-35A 스텔스기 같은 첨단 공격형 무기를 들여왔다. F-35A는 청주기지에서 떠서 15분 만에 300㎞ 떨어진 평양의 주요 시설을 공격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다. 군은 무인기, 정밀유도탄, 전자기펄스(EMP)탄, 경항공모함 등도 대거 도입할 계획이다. 군사합의서를 체결하며 긴장완화를 다짐했던 문재인 정부의 ‘이중적 행태’(7월25일 김 위원장 발언)에 북한이 당혹감을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부는 8월 한·미 연합훈련은 전시작전권 전환에 필요한 사전조치이고, 첨단무기 도입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의 군사력에 대비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도 스텝이 꼬인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F-35A를 두고 주변 국가 방위용이라고 하는 건 북한이 ‘핵무력은 미국용’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허무하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북한은 북한대로 지난 5월부터 11차례나 단거리미사일을 쐈고, 이달에 들어서는 사정거리 2000㎞가 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도 시험발사하면서 ‘쌍중단’ 궤도를 이탈하려 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고, 미국이 전략자산을 한반도 주변에 집중시키던 2017년 못지않게 긴장이 고조될 우려도 있다.

 

북한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제재완화 외에 제도안전(안전보장) 문제를 들고나왔다. 미국이 북한의 제도안전을 불안하게 하고 발전을 방해하는 적대시 정책을 철회해야 비핵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대시 정책의 첫번째 목록에 한·미 연합훈련이 올라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발언은 ‘평화경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같은 한담(閑談)을 벗어나지 못한다. 바둑으로 치면 ‘급한 곳’ 대신 ‘큰 자리’만 두는 격이다.

 

정부의 태도에는 중재 역할의 효력을 상실하면서 한반도 정세의 종속변수로 전락한 데 따른 무력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북한이 최근 금강산에 지어진 남측 시설을 철거하고 ‘우리식’으로 새로 짓겠다고 한 데는 한국 정부가 ‘가만있지 말고 움직이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남측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면 남북 화해협력은 꿈도 꾸지 말라는 통첩이기도 하다.

 

정부가 할 일은 자명해 보인다. 북·미 협상만 기다리며 좌고우면하지 말고 대북 제재와 제도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이끌어냄으로써 ‘쌍중단’ 원칙을 복원해야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 무기를 내려놓자’는 것이니 명분도 확실하다. 11월 중순 열리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문 대통령이 직접 ‘연합훈련 중단’ 방침을 천명하는 것도 방법이다. 비핵화와 별개로 재래식 군비통제와 긴장완화 등을 다루는 ‘남·북·미 군사협정’(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을 체결하는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금강산관광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개를 모색해야 한다. 금강산은 물론 개성에서 개별관광을 우선 시행하는 것으로 활로를 뚫어 나갈 필요가 있다. 우물쭈물하다간 남북관계가 아예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남북 접촉을 막는 유엔사의 월권에도 제동을 걸어야 한다. 몇 가지 원칙을 묶어 ‘문재인 독트린’을 내놓는 건 어떨까. 좀 더 과감해지지 않으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없다.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 자유왕래와 교역 문호개방을 담은 7·7선언(1988년)을 발표한 것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발생한 지 8개월도 채 안됐을 때였다.

 

*2019년 10월3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원제는 '[경향의 눈] 남북관계, 무엇을 할 것인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