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31. 21:08

경향신문DB

북한이 준비한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고만으로도 북한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북한과 미국 간에 2년간 조성됐던 협상 국면이 종언을 고했음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알리기도 쉽지 않다. 이제 북·미관계는 수십년간 되풀이해온 경로를 다시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협상 시작→갈등 재연→협상 중단을 무한 반복하는 폐곡선 경로다. 생각만 해도 폐소공포증이 느껴진다. 한반도의 운명이 바위 굴리기 천형(天刑)을 반복하는 시시포스와 다를 게 뭔가.   
 

북한이 내년 초 신년사에서 밝힐 ‘새로운 길’이 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폐곡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나서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북한은 미국의 ‘절대반지’인 대북 제재를 무력화하는 쪽으로 국제질서 재편을 꾀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지난 16일 유엔 안보리에 대북 제재 부분 해제 촉구 결의안을 제출한 것은 그 예고편으로 보인다. 
 

북한이 한발 더 나아가 ‘비미(非美) 비핵화’를 추진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국은 믿을 수 없으니 중국과 러시아 등의 참관하에 영변 핵단지를 해체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전임 행정부 때 체결한 이란 핵합의를 깬 트럼프가 ‘비핵화의 인증자’ 자격이 있느냐는 문제제기를 동반한다. 이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명분도 약화시킬 수 있다. 반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같은 군사행동은 미국이 쳐둔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는 만큼 자제할 가능성이 짙다. 경제 부문에서는 제재 대상이 아닌 관광산업 활성화로 외화를 수혈하며 버티기에 나설 것이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면 북한은 내년 한 해 기동전보다 진지전을 펼 가능성이 크다.
 

중국 역시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 대열에서 이탈할 동기는 충분하다. 미·중 패권경쟁이 ‘역사적 국면’이 된 현실에서 중국은 북한을 통해 동북아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미·중 무역분쟁이 봉합된다 해도 힘겨루기는 지속될 것이고, 주전장(主戰場)은 남중국해, 대만해협, 한반도 등 동아시아가 될 가능성이 크다(이희옥 성균관대 교수). 미국이 동북아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를 추진하는 사정이고 보면 중국에 동북아의 린치핀(핵심축)인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은 한층 커졌다. 
 

북·미 협상의 파탄은 트럼프에게 명백한 실점이지만, 대선 레이스를 앞둔 트럼프는 ‘새로운 길’을 고안할 의지도 동력도 없어 보인다. 미국은 셈법을 바꾸지 않은 채 북한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내년 한 해를 보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실패는 한·미 공조하에서 북·미 협상→비핵화→한반도 평화라는 ‘패스트트랙’을 타려던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실패했음을 뜻한다. 갈 길은 먼데 차량이 고장났고, 날까지 저물었다. 미국과 한길을 계속 갈 경우 북·미 공방 속에서 중심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젠 한국도 갈림길을 타야 할 시점이 됐다. 
 

하지만 한국이 어떤 길을 가려 하든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 교류·협력을 재추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북 제재를 돌파하기도 어렵지만, 그보다는 북한의 마음을 되돌리기가 더 만만치 않다. 북한은 지난 2년간 한국을 지켜보면서 남북관계 발전이 북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여전히 강고한 한국 내 보수세력의 존재, 그들이 구축한 ‘반북연대’를 돌파하지 못하는 진보정권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북·미 협상 구도에서 남북관계를 분리해내는 정도가 될 것이다. 북·미 협상의 문이 닫히면 남북관계도 강제종료되는 식이어서는 한반도 평화가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비핵화와 무관하게 남북 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북한에 대한 과도한 정념(情念)을 줄이고 ‘쿨(cool)한 이웃’으로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남북관계 규정(남북기본합의서)을 바꿔 남북을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 동·서독처럼 북한과 남북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조약에 상호체제 인정, 내정 불간섭, 불가침 등 남북기본합의서의 주요 내용을 담게 되면 그 자체로 ‘남북 평화협정’도 된다.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북한 이슈는 한국의 ‘오지랖’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북한 땅도 우리 땅이다’ ‘우리가 남이가’식 관념을 탈피하지 않는 한 북한 문제의 과도한 정치화는 피할 길이 없다. 북한을 별개 국가로 인정하게 되면 북한어민 추방 논란 같은 불필요한 잡음도 막을 수 있다. 보수·진보 모두 대북 주관주의(主觀主義)에서 벗어난다면 남북관계의 재출발은 한결 가뿐해질 것이다. 기본조약 체결이 영구분단의 길이 아님은 독일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서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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