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벌어진 일 중에서 총선 결과보다도 더 눈길을 끈 것은 국회에 제출된 2차 추가경정예산 내역이다.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국방비에서 9000억원을 삭감하기로 한 것이다. F-35A 스텔스 전투기, 해상작전헬기 같은 미국산 첨단무기 구매 예산을 깎겠다는 발표에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린 이도 있었을 것 같다. “칼을 쳐서 보습(쟁기의 날)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미가서 4장 3절)
부활절인 지난 1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로 텅 빈 바티칸 광장에서 강론했다. “전쟁은 더 이상 안됩니다. 무기 생산과 거래를 중단해야 합니다. 지금은 총이 아니라 빵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 메시지가 나흘 뒤 군사력 밀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반도에서 실현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무기 구매 예산을 줄이기로 한 결정에는 여러 가지 배경과 사정이 있을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몽니를 부리는 미국을 향한 대응 성격도 있을 법하다. 국방부가 삭감 방침에 ‘괜찮다’고 하는 걸 보면 애초 국방예산에 거품이 끼어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21세기의 유일한 냉전지대 한반도에서 ‘총을 빵과 바꾸는’ 이적(異跡)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가슴 뛸 일이다. 어차피 F-35A 전투기는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하는 데는 뛰어난 ‘전쟁신(神)’이지만,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는 무용지물 아닌가.
바이러스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냈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국경이 봉쇄되고 사람들이 활동을 줄이면서 대기오염이 가스실 수준이라는 인도 뉴델리의 하늘 색깔이 쪽빛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은 27개국에서 봉쇄 초기 2주 동안 지표면의 이산화질소(NO2) 농도가 평균 29% 감소했고, 초미세먼지(PM2.5)는 9%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인적이 끊긴 해안도로를 바다사자들이 점령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에 물고기 떼가 회귀했다. 인간들이 빼앗은 그들의 땅을 잠시나마 바이러스가 되돌려준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환경파괴를 멈추지 않는 한 인류도 절멸의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묵시(默示)한다. 삼림파괴로 숙주들과 인간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 바이러스 창궐 배경임은 알려진 대로다. 삼림파괴 추세가 지금대로라면 제2, 제3의 팬데믹이 주기를 앞당겨 인류를 덮칠 것이다. 환경파괴에 따른 기후위기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치닫고 있음은 부연할 것도 없다.
전쟁은 환경에 대한 극단적인 테러다. 전쟁은 땅을 오염시키고 삼림을 파괴하고, 바다를 더럽힐 뿐 아니라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만들어낸다. 베트남전쟁에서 살포된 고엽제가 베트남 농토의 40%를 황무지로 만들었고, 밀림의 절반가량을 파괴했다. 코소보에서는 화학공장지대 폭격으로 유출된 기름과 암모니아가 강을 뒤덮었다. 콩고에서는 수천마리의 코끼리가 내전에 희생됐다. 이런 전쟁을 위해 세계가 지출하는 군사비는 30년 전의 2배로 늘었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 미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는 22일 현재 4만4805명에 달한다. 바이러스 창궐 두 달간의 희생자가 한국전쟁 3년간 미군 전사자 수(3만3686명)를 넘어섰다. 국방비는 지속적으로 늘리면서도 보건의료와 복지 투자는 외면해온 미국이 자초한 현실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가치 전도의 세상을 ‘리셋(reset)’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세우지 않는다면 ‘애프터 코로나’는 인류 멸절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이 혼돈의 시기에 한국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감염병 통제에 성공했다. 선거도 차질 없이 치러내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한국이 ‘애프터 코로나’ 시대의 질서와 규범을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할 자격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한반도와 세계적 차원에서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평화는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지키는 일이다. 우선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일, 즉 군비를 줄여 보건의료와 복지 부문에 돌리는 흐름을 한국이 선도해 갈 것을 희망한다. 한국은 방위력 개선비와 전력유지비 등에서 매년 5조원 이상을 절감할 여력이 있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고 한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향의 눈]결국 대북전단이 문제였다(경향신문 2020.7.2) (0) | 2020.09.15 |
---|---|
[경향의 눈]남북 ‘갈라서기’로 70년 전쟁 마침표 찍자(경향신문 2020.5.28) (0) | 2020.09.15 |
[경향의 눈]‘개방형 통상국가’ 한국을 덮친 팬데믹(경향신문 2020.3.19) (0) | 2020.09.15 |
[경향의 눈]일본의 ‘국민 버리기’ 작전(경향신문 2020. 2.20) (0) | 2020.09.15 |
[경향의 눈] 도로시의 북한 여행(2020.1.23) (0) | 2020.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