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불만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 폭파로 이어진 6월의 격동은 남북관계의 ‘흑역사’로 남게 됐다. 그 바람에 ‘한국전쟁 70년’의 현재적 의미를 차분히 성찰할 기회도 사라졌다. 그렇다 해도 지난 한 달간 북한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를 짚어보는 일마저 생략해선 안 된다.
4·27 판문점선언은 2조 1항에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지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 행위들을 중지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는 애초부터 지켜질 가능성이 낮은 ‘거품’ 조항이었다. 반북주의가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대북전단 규제는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 이상으로 풀기 힘든 난제이기 때문이다.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가 안 되는 것은 미국 탓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전단 규제는 한국 정부의 역량과 의지, 여론 설득 능력과 직결돼 변명의 여지도 없다. 대북전단은 북한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 저주를 담고 있고, 음란비디오 표지에 최고지도자 부인 얼굴을 합성하는 따위의 저속한 지라시도 있다. 규제가 마땅한 ‘헤이트 스피치’(증오표현)의 일종이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허울 아래 보호돼 왔다. 북한에 대해서라면 명예훼손도, 거짓말도 용서되는 ‘반북무죄’ 사회이니 대수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판문점선언 이후 북한은 남측의 이행 여부를 주시했을 것이다. 민간이 하는 일을 규제할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도, 남측이 남북화해를 제도화할 의지가 있다면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낼 것으로 기대했을 법하다. 하지만 판문점선언 이후 6월4일 김여정 담화 이전까지 대북전단이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이 된 적은 없었다. 탈북민단체들은 버젓이 전단을 살포했고, 정부·여당의 입법 노력은 없다시피 했다. 자유북한연합은 지난해에만 11차례 대북전단을 날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년 전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발표돼도 이행되지 못하면 기대를 품었던 분들한테 더 낙심을 줄 것”이라고 했는데, 말한 그대로였다.
‘거품’은 또 있었다. 남북은 판문점선언 3조 2항에서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고 신뢰가 실질적으로 구축되는 데 따라 단계적으로 군축을 실현해 나가기로’ 했다. 9·19 남북군사합의도에서도 ‘단계적 군축을 실현해 나가기로 한 ‘판문점선언’을 구현하기 위해 실행 대책들을 협의하기로’ 했다. 군사합의 직후 남북은 접경지역 일대에서 적대 행위를 중단했고, 비무장지대 감시초소를 시범 철수했으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도 이뤄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2019년 들어 정부가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 계획을 내놨고, F-35 스텔스기 등 공격형 첨단무기를 잇따라 들여왔다. 2018년엔 중단한 한·미 연합훈련도 재개했다. 8월 훈련 때는 ‘수복지역에 대한 치안·질서유지’, 즉 북한 점령훈련도 실시됐다. F-35는 레이더에 발각되지 않고 평양 상공까지 침투해 선제타격할 수 있는 무기로 북한의 전투기와 지대공 미사일로는 대응할 수 없다. F-35가 지난해 3월부터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비상이 걸린 북한은 단거리 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 개발로 맞대응했다. 이쯤 되면 “우리를 겨냥한 최신 공격형 무기 반입과 미국, 남조선 합동 군사연습은 군사 분야 합의서에 대한 난폭한 위반이며 도전”(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이라는 북한의 비판을 생트집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F-35 도입은 박근혜 정부 때 이뤄진 계약이어서 어쩔 수 없고, 국방비 증액도 전시작전권 전환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정부는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됐건 ‘군사적 긴장해소와 신뢰구축’을 거쳐 ‘단계적 군축’으로 나아가자는 합의의 취지와 어긋나는 건 분명하다. 군사적 신뢰구축과 전작권 전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는 ‘두 마리 토끼’다. 전작권 전환을 임기 중 달성하려 했다면 남북군사합의를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1990년대 이후 남북 간에는 적지 않은 합의들이 도출됐지만 이행된 것은 드물다. 북·미관계의 부침에 따른 북한의 태도 변화,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한국의 권력구조 등이 장애물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검토해야 할 사안들까지 일단 내놓고 보는 단기 성과주의가 대북정책에서도 작동한 흔적이 엿보인다. 어찌됐건 지금대로라면 판문점선언, 9·19 군사합의도 ‘부도수표’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부도 위기에 놓인 합의를 살려내기 위한 실행계획을 짜는 것이다. 남북관계 복원, 북·미 대화 중재는 그다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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