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르포]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초(南三陸町)

서의동 2011. 3. 16. 11:58
15일 오후 일본 센다이에서 택시를 빌려타고 꼬박 3시간40분만에 도착한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 마을. 지난 11일 대지진과 함께 밀어닥친 쓰나미에 휩쓸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공간을 거대한 쓰레기 잔해더미가 채우고 있었다. 초겨울 기온에 가랑비마저 흩뿌려 체감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마을의 어귀에는 ‘재해파견’이라고 쓰인 흰 천을 두른 자위대 트럭과 통신장비를 짊어진 얼룩무늬 군복차림의 자위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미나미산리쿠초 모습/신화


미야기현 북부의 미나미산리쿠는 주민 1만7000여명 중 1만명이 실종돼 미야기현 내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 마을이 ‘괴멸’됐다는 일본 언론들의 표현을 절감케 하는 살풍경이 펼쳐졌다. 
계곡 구석구석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쓰레기 더미들을 보자 쓰나미가 엄청난 위력으로 차와 주택은 물론 전신주까지 삼키던 장면이 떠올랐다. 목조주택을 이루던 골재들이 뒤엉켜 있고 마을 도로 양쪽에도 쓰레기가 언덕을 이뤘다. 나무 두그루 사이에 일부러 끼워놓은 듯 바퀴가 들린 채 멈춘 미니트럭, 어느 집 벽에 걸려 있었을 그림액자, 이불, 자전거 안장, 에어콘, 핸드백, 전화기 등 각종 세간살이들이 가옥의 목조잔해들 사이에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었다. 쓰나미의 충격으로 차에서 튕겨져나온 듯한 타이어 옆에는 어느 집에선가 쓰였을 보온밥솥이 놓여 있었다. 방바닥에 까는 다다미도 통째로 뜯겨진 채 목조골재들 사이에 삐죽 나와 있었다.

자위대원과 일본 서부 돗토리현에서 파견된 소방대원, 스위스에서 급파된 구조대원들이 탐지견을 앞세워 쓰레기 더미에 혹시라도 묻혀 있을 실종자들을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6명이 발견됐다고 소방서 관계자는 말했다. 마을 주민인 사토 가쓰오(65)는 “아마 대부분 바다에 쓸려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존해 있더라도 지진과 쓰나미로 전기, 통신이 모두 끊기면서 가족들이 소식을 확인하는 데 며칠씩 걸리는 상황이다. 이날도 현장에는 가족들 생사확인을 위해 현장을 찾은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쓰나미로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치바 가즈히로(40·농업)는 사흘이 지난 14일 어머니를 간신히 피난소에서 만났지만 할아버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웃 주민들과 노인클럽에 가느라 집을 비워 화를 면했다. 아내 에미코(42)는 집에서 차를 몰고 탈출하다가 고지대에 닿자 차를 버린 뒤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치바는 소식이 끊긴 할아버지의 행방을 찾느라 소방본부가 설치된 마을에 다녀오는 길이다. 뭘 들고 있느냐고 묻자 폐허속에서 발견한 아내의 차속에서 가재도구들만 빼내왔다고 한다.

“집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이거라도….”
그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간간이 하늘을 올려다보다 결국 눈물을 떨궜다. 아내 에미코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초점잃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외신기자들의 영어통역 지원을 위해 현장을 찾은 시바타 가오리(25·여·센다이시 거주)는 기자들의 질문을 일본어로 옮길 때마다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마을주민 후지와라 게이이치(63·건축업)는 “쓰나미가 올 때 마을언덕에 있는 신사로 죽어라고 뛰어 올라갔다”며 “높이 10m쯤 되는 곳인데도 허리에까지 물에 잠겼다”며 당시 상황을 전하며 몸을 떨었다. 후지와라는 “35년전 쯤 마을에서 쓰나미를 겪은 적이 있어 빨리 피했지만 당시를 경험 못한 사람들이 대피가 늦었다고 들었다”며 특히 “공교롭게도 지진으로 마을 경보장치가 고장났고, 휴대전화도 두절되면서 피해가 커진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 역시 모친과 장모의 행방을 몰랐다가 피난소에서 간신히 찾아냈다. 연락이 두절된 어머니의 생존을 나흘만에 확인했다는 미우라 사와코(57·센다이 거주)는 “일단 안심은 했지만 (마을이 이렇게 돼)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감당이 안된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가에서 주은 앨범에는 앳된 표정의 소녀가 구김살없이 웃고 있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 소녀는 살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