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부처에 근무하는 사토 마나부(43·가명)는 지난 여름 가족들과 서울여행을 다녀오면서 ‘엔고(円高)’의 위력을 실감했다. 엔화값이 높아져 서울의 음식값, 택시비에 든 경비가 1년전보다 10%이상 낮아져 넉넉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사토는 “해외에 나와보니 엔고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다”며 “한국이 최근 물가가 뛰고 있다고 들어 걱정했지만 1년전 여행에 비해 같은 경비로 쇼핑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엔화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머리를 싸매고 있지만 국민들은 되레 즐기고 있다. 각종 상품의 수입가격이 많게는 절반이상까지 낮아진 데다 해외여행에도 부담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부가 수출 대기업을 위해 원화가치를 일부러 떨어뜨리거나 하락을 사실상 방조하면서 물가가 급등하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일본 인터넷 쇼핑몰 라쿠텐(樂天)에서는 ‘엔고환원 세일’이 한창이다. ‘엔고환원 세일’은 엔화 가치가 올라가면 당연히 수입 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에 그 차액을 고객들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를 담은 마케팅 전략이다.
30일 현재 정가 36만9600엔(538만원)인 카르티에 손목시계 탕크프랑세즈 핑크셸을 25만5239엔(371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프랑스제 클로에 핸드백은 13만6500엔(199만원)의 가격에서 40%가량 할인된 7만9800엔(116만원)에 판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파격세일이다. 라쿠텐이 취급하는 엔고환원 세일품목은 320만점에 이른다.
일본 도쿄 니혼바시의 특급호텔인 로얄파크 호텔은 지난달 ‘100달러 엔고환원 숙박 이벤트’를 실시했다. 하룻밤 100달러를 줘야 하는 방을 엔화가격으로 환산해 1박에 7700엔으로 2명이 이용하는 이벤트다. 비즈니스 호텔도 하룻밤 요금이 1인당 최소 5000엔 이상 줘야 하는 일본의 물가사정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파격세일이다. 엔화가격 급등으로 호텔에 숙박하려는 외국인 관광객이 줄어들자 내국인들을 상대로 특별 세일을 실시한 것이다.
유통대기업 세븐&아이 홀딩스의 이토요카도도 지난 8월 호주산, 미국산 식료품 30종을 대상으로 최고 50% 가격을 인하하는 엔고 세일을 실시했다. 음반업체 타워 레코드도 1매 1000엔의 외국음악 수입 CD를 888엔에 판매하고 있다. 패션 브랜드 바이마는 14~63%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가방, 의류, 신발 등의 해외수입품을 판매하고 있다. 항공권 할인업체들은 최근 일본 나리타(成田)-인천 왕복 항공할인권을 1만8300엔에 내놓았다.
하지만 엔고 환원세일은 지난해에 비하면 다소 기세가 줄어든 편이다. 엔화가 급등하던 지난해 여름과 달리 엔화강세 기조가 연내 장기간 지속된 영향으로 기업들이 판매차익을 챙기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올해의 경우는 특히 밀가루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엔고의 메리트가 상쇄된 상품들도 많다. 편의점 업체 서클K 나카무라 모토히코(中村元彦) 사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엔고가 없었다면 가격인상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출장이 잦은 사쿠라이 이즈미(櫻井泉·50·회사원)는 “엔화값이 높아져 기업들이 걱정이라는 보도들이 많긴 하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고 그만큼 소비가 늘어나면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일, 엔고 방어 한계 ‘활용론’ 부각
엔화의 사상유례없는 초강세는 유럽의 채무위기와 미국 경기의 침체, 2008년 금융위기와 달리 구원투수가 보이지 않는 혼미한 세계경제를 반영한다. 1달러당 75.83엔(28일 기준)인 엔·달러 비율이 70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정도로 엔고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엔화의 사상유례없는 초강세는 유럽의 채무위기와 미국 경기의 침체, 2008년 금융위기와 달리 구원투수가 보이지 않는 혼미한 세계경제를 반영한다. 1달러당 75.83엔(28일 기준)인 엔·달러 비율이 70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정도로 엔고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0일 “과거의 엔화 급등세는 일시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의 엔고는 장기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통화선물거래실적에 따르면 지난 25일 현재 달러 대비 엔화의 초과매입액은 6785억엔으로 1주일 전의 2배에 달했다. 국제 투기자금들이 엔화강세 지속에 베팅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유럽연합이 지난 27일 채무문제 해결방안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를 도출하고, 일본은행도 추가 금융완화책을 내놨지만 엔고 추세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되레 1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와 3일 유럽중앙은행(ECB) 이사회에서 미국과 유럽이 추가로 달러와 유로화를 추가방출할 것으로 예상돼 엔고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글로벌 주가하락으로 자산감소를 우려한 일본 투자자들이 투자회수에 나선 것도 엔화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손해보험사들은 9월까지 3개월 연속으로 해외 중장기채를 매각해 순매도액이 6612억엔에 달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木+神 原英資)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대학 객원교수는 최근 한 포럼에서 “엔화가 달러당 7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엔고흐름을 거스르기 보다는 ‘엔고현실’을 받아들여 적극 활용하자는 태도변화도 일본 정부와 재계에서 엿보이고 있다. 정부와 일본은행은 엔고에 따른 공장 해외이전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 내 공장을 건설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나가하마 도시히로(永濱利廣) 일본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주간 이코노미스트 기고에서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가 6.1조엔인 반면 소득수지(해외투자로 벌어들인 배당 등의 소득)가 11.6조엔에 달했다면서 ‘투자입국’의 시대가 왔음을 강조했다. 그는 “엔고를 활용해 해외투자를 적극 늘리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이익으로 국내고용과 소득및 소비를 늘리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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