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인터뷰] 일 총선 최고령 출마 ‘무소속’ 94세 가와시마

서의동 2012. 12. 25. 17:05

“TV토론을 보니 정치가들 입에서 ‘군’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 일본은 패전해서 무조건 항복을 한 나라인데도 말이지. 일본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불안해 견딜 수 없었어.” 

 

지난 16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 94세의 최고령으로 출마한 가와시마 료키치(川島良吉·94)는 지난 2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출마 이유에 대해 “일본 정치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고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사이타마현 하뉴시에서 만난 가와시마. 청력이 다소 약해진 것외엔 94살이란 나이를 실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했다. 일본언론들이 붙여준 별명은 '마징가 토크'. 한번 말을 시작하면 멈출줄 모르기 때문이다. /by 서의동




사이타마(埼玉)현 하뉴(羽生)시에서 독거생활을 하는 그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총재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유신회 대표가 헌법을 바꿔 군대를 보유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것에 부아가 치밀었다고 했다. ‘폭주노인’임을 자칭하는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에 대해서도 “내가 14살이 더 많다. 전쟁을 잘 모르니까 전쟁이니 군이니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가와시마는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 19세 때 징집돼 1945년 패전 때까지 7년간 중국에서 머물렀다. 난징(南京) 부근 부고우(蕪湖)에서 오장(伍長·한국의 하사에 해당)으로 퇴역한 이후 중국 현지에 일본기업이 세운 무역회사에서 3년간 군자재 거래업무를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 일본군들은 수용소에 수감됐지만 그는 무역회사 때 거래하며 사귄 중국인들의 집에 머물렀고, 귀국할 때도 크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나를 돕던 중국인들이 ‘전쟁에 진 것은 일본이지 당신이 아니지 않느냐’고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군복무 시절 전쟁의 잔혹상을 목도한 그는 귀국 후 평화주의자가 됐다.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이 돌아와서 입을 다물고 있어 잘 모르지만 일본 군인들 나쁜 짓 많이 했어. 전쟁이 사람의 마음까지 못쓰게 만들어 버리지.”  

 

올해 총리관저 앞 원전반대 시위에도 참가한 바 있는 가와시마는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번민에 휩싸였다. 민주당 정권에는 기대를 접은지 오래지만 대신 자민당이 재집권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총선을 앞두고 12개 정당이 나왔지만 맘에 드는 곳이 없었어. 탈원전을 내세운 일본미래당이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사는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해. 미래당의 추천이라도 받으려고 했지만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퇴짜 맞았어.”

 

결국 무소속으로 입후보하기로 하고 선거공시를 닷새 앞둔 지난 11월30일 큰 동생(85)과 여동생(80), 막내동생(76), 출가한 딸 토시에(敏江·62)를 불러 결심을 통보했다. 장례비에 쓰려고 모아둔 300만엔(약 3800만원)을 선거 공탁금으로 쓰겠다고 했다. “장례식 치러주지 않아도 좋으니 출마하겠다.” 그의 고집을 익히 아는지라 군소리는 하지 않았다. 선거공시날인 지난 4일, 후보등록 마감 10분을 앞둔 오후 4시50분 사이타마현 선관위에 무소속 등록절차를 가까스로 마쳤다.

 

‘반대는 하지 않지만 돕지는 않겠다’던 가족들도 막상 출마가 결정되자 팔을 걷어붙였다. 가나가와현에 사는 사위(62)가 120㎞의 거리를 매일 오가며 선거참모 역할을 했고, 발음이 좋지 않은 가와시마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딸 토시에가 ‘대변인’이 됐다. 손자와 손자 친구들까지 어림잡아 연인원 20명이 선거운동원 역할을 했다. 병상신세인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94)이 가와시마의 출마소식에 기운을 차려 흰 천에 붓글씨로 이름을 써 어깨띠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출마가 늦어 선거공시 닷새 뒤에야 포스터가 만들어졌고, 선거운동은 투표 이틀 전인 14일부터 이틀간으로 압축했다.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 수호’와 ‘원전 반대’를 내건 가와시마의 유세는 대체로 썰렁했지만, 아침마다 1시간씩 발바닥 맛사지를 한다는 그의 건강비결 소개가 인기를 모았다. 역앞 유세에 몰려온 초등학생들에게는 전쟁체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가 이번 선거에서 얻은 표는 전체 유효투표수의 1.1%인 2169표로, 6명의 후보자 가운데 최하위이지만 “몇백표라도 나오면 다행”이라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선전이었다. 그의 출마소식을 대서특필한 언론들이 선거운동을 톡톡히 해준 덕분이다. 선거공시 나흘 뒤인 지난 8일 일본 스포츠지 ‘스포츠 호치’가 그의 사연을 1개면을 털어 화제기사로 보도하자 로이터, APF통신 등 주요 외신들이 뒤이어 그를 인터뷰했고 TBS, 니혼TV, 후지TV 등 일본 민간방송에도 그의 출마가 소개됐다. 

 

공탁금 300만엔이 아깝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득표율이 10%가 안돼 300만엔은 돌려받을 수 없지만 대신 독일, 폴란드 등 세계 각국에 나의 주장이 알려진 것은 성과”라고 말했다.

 

가와시마의 출마사연이 알려지자 인터넷에서는 ‘할아버지 고마워요. 장례비를 모아주자’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94세 노인의 분투를 접한 노인 가운데 내년 7월 참의원(상원)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이들도 생겨났다. 가와시마의 사위 다나카 오사무(田中修·62)는 “혼자 가사는 물론 운전도 할 정도로 건강하지만 선거치르느라 요즘 조금 피로한 상태”라면서 “하지만 여기 저기서 찾아오겠다는 이들이 많아 조금 들떠있다”고 말했다. 

 

가와시마가 이날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전쟁의 참상을 잊어버린 채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 대한 걱정이다. “일본은 전쟁의 참상을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미국과 전쟁해서 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젊은이들도 많아. 교과서엔 실려 있지만 잘 가르치지도 않는다.”

 

가와시마는 앞으로의 일본이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강한 나라가 되려면 국민의 희생이 따른다. 굳이 강한 나라가 되기보다는 국민이 행복하고 건강한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일본은 자연과 조화하며 살아온 역사와 문화가 있다. 중국과 한국, 북한과도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는 나라다.” 

고령화에 최근엔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이 그래도 아직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은 가와시마 같은 이들 때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