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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왜 책] 블랙기업-일본을 파괴하는 요괴

서의동 2013. 1. 12. 17:52

2008년 일본 기상예보회사인 ‘웨더뉴스’의 신입사원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려운 기상예보사 자격시험을 거쳐 취업한 이 사원이 입사 반년만에 숨진 이유는 과로와 ‘파워 허래스먼트’(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행위) 때문으로 밝혀졌다. 



이 회사는 입사 후 6개월을 정식사원이 되기 위한 ‘예선’으로 설정해 이 기간 중 상상을 초월하는 과다노동을 부과했다. 숨진 사원은 월 200시간이 넘는 잔업을 강요당했고, 그럼에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상사의 질책에 시달렸다. 주점 체인인 ‘와타미(和民)’에서도 같은 해 26세의 여성사원이 입사 두달만에 투신자살했다. 그는 한달간 140시간 이상 초과근무를 했고, 휴일에도 오전 7시부터 시작되는 연수에 참석해야 했다. 

 

이런 회사들을 일본에서는 ‘블랙기업’이라고 부른다. 블랙기업은 위법적인 고용형태로 젊은이들을 ‘1회용 소모품’처럼 쓰다 버리는 악덕기업을 가리킨다. 젊은이를 대량 고용한 뒤 장시간 근무와 부조리한 명령으로 혹사시킨다. 도태된 사원들은 정신질환에 걸려 퇴사하거나 심한 경우 자살을 선택한다. ‘대량모집→선별→쓰고버리기’가 블랙기업의 전형적인 고용패턴이다. 

 




청년 노동문제를 다뤄온 일본 NPO법인 포세(POSSE)대표 곤노 하루키(今野晴貴)가 1500건이 넘는 노동상담을 토대로 쓴 <블랙기업-일본을 파괴하는 요괴(ブラック企業-日本を食いつぶす妖怪)>(분게이슌주(文藝春秋))는 블랙기업의 실태와 사회적 배경, 대처방안을 다룬 문제작이다. 블랙기업은 중도퇴직자가 많기 때문에 전체 사원규모에 비해 모집인원의 비율이 높고, 초임을 높게 제시하지만 설명은 애매하다. 초과근무를 해야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의류판매기업도 블랙기업의 범주에 든다. 유명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 많이 입사하는 기업이지만, 입사후 연수과정에서부터 ‘절대적인 순종’을 강요한다. 접객매너를 훈련시킬 때는 표정, 자세는 물론 걸음걸이와 몸동작까지 매뉴얼대로 따를 것을 강요하고 끊임없는 질책으로 상당수 사원들이 탈락한다. 


연수가 끝나 점포에 배치된 뒤에도 ‘자기학습’이라는 명목으로 매뉴얼을 암기토록 하는가 하면 초과근무를 암묵적으로 강요받는다. 매뉴얼은 ‘대외비’라며 손으로 베껴쓰도록 한다. 한 퇴직사원은 “30분전에 출근했더니 ‘너무 늦다’고 질책당했다. 매주 매뉴얼 테스트 때문에 퇴근후에도 매일 공부해야 했고, 휴일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증언했다. 

 

도쿄의 20대 여성은 초봉 25만엔이라는 초임에 이끌려 정보기술(IT)기업에 입사했으나 첫날부터 “보고 있으면 짜증난다”는 등의 막말에 시달렸고 월 100시간의 잔업을 강요당했다. 얼마 안가 수면장애에 걸렸고, 나중에는 우울증 진단을 받아 회사를 그만뒀다.

 

악덕기업은 어느 나라에든 있게 마련이지만, 블랙기업은 일본형 고용관행과 관련이 크다. 과거 일본 기업은 종업원들을 종신고용하는 대가로 명령권을 절대화해 ‘회사인간’을 양산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가 장기불황에 빠지면서 종신고용은 사라진 반면 명령권의 강도는 약화되지 않은 것이 블랙기업의 토양이 됐다. 청년 취업난이 심각한 데다, 이직을 극도로 꺼려하는 일본의 취업문화도 배경으로 지목된다. 

 

블랙기업은 청년들이 결혼·출산을 미루도록 하면서 저출산 현상을 가속화시킬 뿐 아니라 정신질환을 만연시켜 국가의료비에 부담을 지우는 등 갖가지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블랙기업은 고용보장이 무너졌고, 청년 취업난이 심한 한국에서도 언제든 사회문제로 대두할 우려가 있다. 용어만 없을 뿐 이미 블랙기업적 행태가 만연해 있을 가능성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