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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 문화혁명의 미몽에서 깨어난 중국인들의 '신유민(流民)사'

서의동 2013. 3. 7. 17:34

감미로운 등려군의 노래가 배경에 깔린 평범한 연애이야긴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거운 내용이더군요. ‘문화혁명’의 미몽에서 갓 깨어난 80년대 중국인들의 ‘신(新)유민사’ 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는 인민복 차림의 주인공 여소군(여명분)이 대륙의 ‘무석’이란 곳에서 기차편으로 홍콩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동양권에서 가장 발달된 자본주의 도시인 홍콩의 첫인상은 별로 활기차 보이지 않습니다. 꽤나 무거워 뵈는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객차를 나서는 승객들의 처진 어깨와 어스름한 불빛의 역구내가 소군이 감당할 미래가 간단치 않음을 암시합니다. 


영화 <첨밀밀>의 한 장면


이교(장만옥분)역시 같은날 기차를 타고 홍콩에 도착한 ‘대륙인’이지만 소군보다 빠르게 적응합니다.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부터 영어학원 ‘삐끼’, 유리창청소 등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섭니다. 둘은 이교가 일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처음 만납니다. 창녀생활을 하는 고모 외에 피붙이라곤 없는 소군과 또순이처럼 바쁘게 살아가지만 허전함을 느끼던 이교는 곧 가까워지게 됩니다.


둘을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한 것은 등려군의 노래. 이교와 소군은 명절대목에 맞춰 등려군의 판넬과 브로마이드, 비디오 판매노점상을 차립니다. 등려군은 막 개혁개방의 길에 들어선 중국대륙에선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가수였던 모양입니다. 


이교의 고향 광주에서의 기억을 살린 사업 아이템이었지만 홍콩에선 등려군은 식상한 존재였나 봅니다. 전혀 팔리지 않았던 거죠. 장사를 망친 날 둘은 밤을 함께 보내게 되고 이후 등려군의 첨밀밀을 흥얼거리며 자전거를 타는 연인사이로 발전하죠. 그들의 관계는 그러나 소군이 고향에 두고온 애인때문에 거리를 두게 됩니다. 


이교는 87년 주가대폭락사태때 모아둔 돈을 몽땅 까먹게 됩니다. 억척스럽게 키워가던 ‘홍콩드림’이 하루아침에 깨진 거죠. 망연자실하던 이교는 안마시술소에 취직하고 거기서 조폭을 만나 ‘조폭마누라’가 됩니다. 소군도 고향에 있던 애인을 불러내 결혼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둘은 서로를 잊지 못하고 급기야 어느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조폭이 미국으로 떠나고 이교는 함께 산 정을 떼지 못해 조폭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떠나는 건 아닙니다. 한번 실패를 맛본 이교는 미국사회에 별 기대감을 갖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피난처로 여겼던 조폭에 새로운 애정을 느끼고 돈보다는 가족에게서 삶의 위안을 찾으려 하죠. 


소군역시 (이교의 미국행을 모른채) 아내와 헤어진뒤 미국으로 떠나 음식점에 취직합니다. 이교는 남편이 흑인 불량배의 총에 맞아 죽은뒤 우여곡절끝에 여행가이드로 새출발을 합니다. 둘은 아주 가까이 살면서도 몇년동안 소식도 모른채 세월을 보내다 등려군의 요절소식이 방영되고 있는 차이나타운의 한 전파상 TV수상기앞에서 우연히 재회합니다. 


여소군과 이교는 19세기말~20세기초 전세계로 팔려나간 ‘쿨리’들을 연상케 합니다. 영화의 시선은 개혁개방이후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에 힘겹게 적응해 나가는 중국인들의 뒷모습을 따라갑니다. 마지막에 헤어졌던 둘을 만나도록 하지만 재회하기까지 겪었던 고난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듯, 대륙인들이 새로운 체제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등려군 노래의 역할이 재미있습니다. 소군과 이교사이의 ‘연가’이기도 하거니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고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둘만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이교에게는 고향 광주와 자본주의 홍콩간의 차이점을 환기시키는 ‘각성제’였지만... 


정치체제만 사회주의일 뿐 급속도로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오늘의 중국대륙에도 또다른 소군과 이교‘들’이 버거운 일상을 힘겹게 잇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