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이 쓴 유명한 동화 <빨간구두>는 마법에 걸린 빨간구두를 갖게 된 어느 소녀의 이야기다. 가난해서 맨발로 다니거나 나막신을 신어야 했던 소녀가 어느 날 빨간구두를 갖게 되고 춤의 명인이 됐지만 마법에 걸려 쉴새없이 춤을 춰야 했다. 신발이 딱 달라붙어 벗을 수 없게 된 소녀는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잘라내야 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일본의 어느 경제학자는 지난달 23일 대폭락을 겪은 이후 요동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 일본 주식시장을 안데르센의 <빨간구두>에 빗댔다. 차원이 다른 대담한 금융완화의 마법으로 치솟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롤러코스터처럼 등락하는 통제불능의 모습이 빨간구두를 신은 소녀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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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안정세를 보였던 일본국채 시장이 불안해진 것은 어쩌면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자르게 될지 모를 심각한 사태가 닥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북아일랜드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재정적자 개선대책을 따져물은 것은 예사로이 넘길 일이 아니다.
3년여간 우왕좌왕하다 물러난 민주당 정권에 대한 실망을 배경으로 등장한 아베 정권은 ‘강한 일본’을 내세웠다.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아베가 지난 6개월여 동안 펼쳤던 정책을 잠깐 돌이켜보자.
아베노믹스의 ‘세개의 화살’ 중 하나인 재정정책을 보면 과거회귀 경향이 두드러진다. 민주당 정권의 정책을 180도 뒤집은 ‘사람에서 콘크리트로’를 비롯해 ‘복지에서 방위로’ ‘지방에서 중앙으로’라는 역코스를 밟아가고 있다. 자립이 어려운 하층민의 생활보호 예산을 9년 만에 최대폭으로 감축하는 대신 방위예산을 11년 만에 늘렸다. 세계 최고의 사회인프라를 갖춘 나라에 웬 영문인지 토목건설 관련 예산을 사상 최대로 편성했다.
결론적으로 ‘레짐체인지(체제전환)’란 말을 즐겨써온 아베가 실제 펼친 정책은 ‘앙시앙레짐(구체제)’의 복원이었던 셈이다. 그뿐 아니다. 사고가 난 후쿠시마 원전에선 아직도 ‘죽음의 재’가 유출되고 있는 데도 원전 재가동에 나서고 해외에 원전을 팔러 다니다 ‘죽음의 상인’이라는 야유를 받고 있다. 반면, 방사능 제염비용을 국가가 더이상 부담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놔 후쿠시마 주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외교에서도 아베는 빨간구두를 신은 듯 세계를 바쁘게 누비며 ‘중국 포위망’ 구축에 나섰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센카쿠(尖閣) 열도를 둘러싼 중·일간의 공방과 과거사 문제에 대한 아베 정권의 안일한 인식은 동맹국인 미국의 불신감만 키웠을 뿐이다.
이달 초 전례없이 장시간에 걸친 미·중 정상의 만남에 초조해진 아베는 G8 정상회의 기간 중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려 했지만 보기좋기 거절당했다. 아베의 숙원인 헌법개정 작업은 여론의 거센 역풍 앞에 일단멈춤 상태에 놓였다. 70%대에 이르던 내각 지지율이 어느덧 50%대로 접어들며 욱일승천 기세도 한풀 꺾였다.
일본은 이쯤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방향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게는 ‘강한 나라’보다는 ‘현명한 나라’가 슬로건으로 더 어울려 보인다. 중국을 포위하려다 포위당할 수도 있음을 감지했다면 1970년대 국교정상화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간의 합의대로 센카쿠 문제는 유보하는 것이 상책이다.
과거사를 뒤엎으려는 시도가 전후(戰後)일본이 쌓아올린 명망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음도 명심해야 한다. 평화헌법이 ‘세계유산’이라는 자민당 원로의 주장을 겸허히 새겨 평화국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면 국제사회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다. 아베 정권은 더 늦기 전에 빨간구두를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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