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기자들은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일본유신회 대표가 설정한 프레임을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지난 27일 도쿄에서 열린 외국특파원협회 기자회견에서 하시모토는 “일본 정부가 직접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증거는 없다”는 말로,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 했지만 그의 시도는 조롱거리가 됐을 뿐이다. 하시모토의 논리는 일본 우익들에겐 먹힐지 몰라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보면 ‘말장난’에 불과했던 셈이다.
요즘 유행하는 ‘국격’이란 말로 가늠해 봐도 최근의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 주요 8개국(G8) 회원국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보편적 인권의식과 도덕적 우위를 지닌 정치인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 때 총리감으로 꼽히던 하시모토는 위안부 망언에 미군들을 상대로 풍속업소(성매매) 업소활용을 권장하는 어처니없는 소리를 하다 나락으로 추락했다.
2년여 체류하면서 지켜본 일본은 선진국치고는 이례적일 정도로 여성인권 의식이 낮아 보였다. 최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성장전략으로 여성 인력활용도를 높이겠다며 여성 육아휴직을 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내놨지만 여성계의 반응은 썰렁했다. 시사주간지 여기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일본에서 여성이 3년간 쉬도록 기다려주는 회사가 있기나 한가. 이 정책이 제도화되면 기업들이 여성채용을 꺼리게 돼 여성 취업기회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날 것”이라며 혀를 찼다. 유치원 아이가 있는 그는 어느 일간지 여기자가 두번째 임신을 하자 회사 간부들이 ‘이제 회사 그만두는 거냐’며 사퇴를 압박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이유가 뭘까. 일본은 근대화 이후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 이는 변혁과정에서 분출되는 에너지가 구성원의 의식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기회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무사정권인 바쿠후의 권력이 일왕으로 넘어간 메이지(明治)유신은 상층부간의 권력교체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 패배와 연합국군사령부(GHQ)에 의한 7년간의 점령기간도 일본을 근저로부터 뒤바꾸지는 못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총지휘한 다이혼에이(大本營)의 작전참모였다가 전후 이토추(伊藤忠) 상사에 입사해 회장까지 지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같은 이들에서도 보듯, 전시 일본을 이끌던 세력들은 잠시 유예기간을 거친 뒤 전후 일본의 중심세력으로 복귀했다. 전후 일본은 서양식 민주주의 체제의 외피를 뒤집어 쓰긴 했지만 속살은 바뀌지 않았고, 그런 탓에 여성인권이 전전(戰前)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일본의 부부동성제도는 여성을 ‘이에(家)’라는 집안의 부속물로 여기는 사고를 보여준다. 학자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활동을 해야 하는 여성이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게 되면, 전 남편의 성으로 발표된 논문이 자신의 것임을 일일히 증명해야 한다. 회사에서 여자선배가 남자후배의 커피심부름을 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은? 호주제가 폐지됐고, ‘서울대 우조교 사건’ 등을 겪으며 사회의식은 다소 개선됐지만 실상이 일본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직장내 성희롱은 ‘갑을관계’와 얽히며 더 교묘해지고 있고 성매매 업소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간 일본인들을 만나면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여성운동이 성장하면서 사회인식도 개선됐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지만 ‘윤창중 인턴 성폭행 사건’이후론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시모토의 망언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면서 개운치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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