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외교가 처음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일본이 하반기 중 정상회담을 열 것을 제안해 왔고, 그에 답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성대로라면 거부하는 편이 손쉽고 명분도 있다. 당장, 8·15 추도사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아시아 각국에 대한 ‘가해와 반성’을 빼먹은 일을 들어 ‘올바른 역사인식을 그렇게 강조했건만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하면 그걸로 족하다. 정부는 9월 초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 중 회담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을 비쳤다. 하지만 어렵고 험한 상대와도 만나 대화를 통해 타협을 도출하는 것이 외교라고 한다면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바람직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정권은 앞으로 별일이 없다면 향후 3년은 지속된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좋든 싫든 어딘가에선 마주치게 돼 있으니 그럴 때마다 얼굴 붉히며 외면하는 것도 겸연쩍은 일이다. 최근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가장 밉고, 보기 싫은 상대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독재국가에 한국을 침략한 북한과도 최근 교류의 끈을 다시 잇기 시작했는데, 일본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을 외면하니 일본도 한국을 배려하지 않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논의하는 총리 직속 전문가회의는 ‘한반도 유사시’에 자위대를 출동시키자는 이야기마저 공공연히 거론한다. 8·15 전에 한·일관계가 복원됐다면 아베가 전몰자추도식에서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 부전(不戰) 결의를 빼지 않았을지 모른다. 최소한 악수하고 있는 동안에는 허리춤에서 총을 빼들 수 없듯,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지속했더라면 일본이 ‘안면몰수’의 상태로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부친의 일본 이름이 거론되는 일을 겪으면서 박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전후(戰後)체제의 탈피를 내세우고, 과거의 식민지배와 전쟁이 잘못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아베 정권과 섣불리 대화를 가질 경우의 리스크도 감안했을 법하다. 그런 이유로 정권 출범 이후 반년간 대화의 문을 닫아걸었다. 하지만 이 정도 냉각 기간을 가졌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과거 독재시절의 ‘반공(反共)’을 방불케 할 정도로 ‘반일(反日)’ 정서가 고양돼 있다. 아베 총리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못지않은 ‘악의 축’이 돼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에 대해 불신과 증오를 키워가고 있다. 한국의 웬만한 종합일간지 이상으로 팔리는 시사주간지들이 최근 ‘한국때리기’ 특집을 잇따라 내보내는 현상은 걱정스럽다.
김대중 정부는 그 ‘밉던’ 북한에 햇볕을 비춰 남북관계를 해빙시켰다. ‘퍼주기’ 논란이 없진 않았지만 북한이 금강산 관광을 위해 장전항에 있던 잠수함 기지를 후방인 원산항으로 물린 것은 화해협력 정책의 성과다. 우경화와 재무장화가 우려된다면 일본에 대해서도 포용정책을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일본이 아무리 싫어도 나라를 통째로 옮겨갈 수는 없으니 일단 끌어안아 더 엇나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장 박 대통령이 일본을 가는 것도, 아베 총리가 한국에 오는 것도 아닌 각국 정상들이 모이는 다자간 회의에서 약식으로 만남을 갖자는 제의까지 내칠 일은 아니다. G20이 어렵다면 이후 회의 때 만나서 과거사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당당히 따지면 된다. 그런 뒤에도 엇나가면 그때 가서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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