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90주년

서의동 2013. 9. 1. 19:19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증언 “둔치에 몰아놓고 기관총 난사… 죽창 끝에 머리 매달아”

ㆍ“경찰 ‘조선인 습격’ 방송, 신문도 유언비어 유포 가담”

“기관차 밑에 숨어 있던 조선인이 발각돼 하천 제방에서 참수됐다. 조선인의 머리가 죽창 끝에 높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5일 피난온 이재민 대학생, (홋카이도) 하코다테신문 1923년 9월6일)

“9월2일인가 3일에 군인들이 조선인 22~23명을 아라카와천 하류둔치로 밀어넣은 뒤 1정인가 2정의 기관총으로 눈깜짝할 새에 총살했다. 그중에는 알몸의 여자도 있었다. 강간을 당한 것 같았다. 시체들은 석유와 장작으로 불태웠다.”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 등 일본 간토(關東)지방을 강타해 10만5000명 이상(행방불명자 포함)이 사망했다. 혼란 상황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퍼지면서 간토지방 일원에서 조선인 수천명이 군대·경찰과 유언비어를 믿은 민중들에 의해 대거 학살됐다. 시민단체 ‘봉선화’ 대표 니시자키 마사오(53)가 만든 3권의 증언자료집은 일본 군대와 경찰이 유언비어 유포와 학살을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들이 대거 습격한다는 상부 정보가 있어 밤 10시를 기해 전투를 개시한다는 중대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이 확성기로 ‘방금 조선인 습격이 있었다’고 방송하고 다녔다.” 특히 군대의 학살 목격담은 지진 다음날인 9월2~4일 사이가 많아 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군대가 계엄령을 이유로 신속하게 투입돼 조선인 학살을 주도했음을 뒷받침했다.

일본 언론들도 유언비어 유포에 가담했다. 도쿄일일신문은 지진 직후 ‘불령선인(不逞鮮人·일본에 불복종하는 조선인)들, 곳곳에 방화’라는 제목의 호외를 발간했다. 또 ‘시민들은 군인, 경찰과 협력해 조선인을 경계하라. 우물에 독을 푸는 사람이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하라’ 등 내용을 담은 포스터와 전단이 신문사 이름으로 유포됐다는 증언들이 담겼다.


‘간토 조선인 대학살’ 알리는 일 양심세력

ㆍ한·일 정부 역사 외면 속 1일 90주년 추도식 행사 열어
ㆍ증언조사·유해발굴·진상규명 서명운동 등 헌신적 노력

한·일 두 정부의 외면으로 묻혀질 뻔했던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이 오늘날 조명을 받게 된 데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세력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증언조사를 통해 실체 규명에 나서고 추모비를 건립하는가 하면 일본의 국가 책임을 묻는 서명운동을 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고 있다. 90주년을 맞은 1일을 전후해 일본 각지에선 시민세력들의 주도로 다양한 행사가 열려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도쿄에서 가장 조선인 학살이 집중됐던 스미다(墨田)구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기누타 유키에(絹田幸惠·1930~2008)는 1975년 학교 수업 차원에서 아라카와(荒川) 하천의 역사를 조사하다 우연히 마을 노인들로부터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하천 둔치에서 대량학살됐고, 시신들을 그 자리에 묻었다는 증언을 우연히 듣고 충격을 받았다. 기누타는 학살의 진상을 캐기 위해 1982년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해 위령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해 9월 추도식을 갖고 유골 발굴 조사에 착수했으나 유골은 전혀 찾지 못했다.

이후 일본 경찰이 대학살 이후 이곳에 묻힌 유골을 전부 파내 옮긴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하천 둔치에 추모비 설치를 추진하고 봉선화를 심었다. 일제강점기에 홍난파가 조선인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은 ‘울밑에 선 봉선화’에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하천법 위반이라며 철거를 요구했고, 하천 둔치 추모비 설치 요구도 당국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2009년 스미다구 야히로(八廣)역 부근의 아라카와천 부근 주택가에 “식민지하 고향을 떠나 일본에 온 이들이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채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이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희생자를 추모해 인권의 회복과 양 민족의 화해를 염원한다”는 추모비를 세웠다.

간토대지진 90년을 맞아 일본에선 외면당한 역사를 알리고 희생자를 추모하려는 행사들이 펼쳐졌다. 지난달 31일에는 도쿄 지요다구 메이지(明治)대학에서 학자, 변호사,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가한 ‘간토대지진 90주년 집회’가 개최됐다. 도쿄 다치카와(立川)시 여성종합센터에서는 재일동포 오충공 감독의 간토대지진 기록 다큐영화 <숨겨진 손톱자국> 상영회와 사진전이 열렸다. 1일에도 도쿄 스미다구에서 일조협회도쿄도연합회가 중심이 된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거행되는 등 10건의 행사가 열렸다.

90주년을 맞아 일본 시민단체들은 학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희생자 실태조사를 실시할 것 등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지난 6월부터 시작해 연말까지 전개할 계획이다. 이들은 서명 명단을 국회 중·참의원 의장에게 전달하고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을 할 예정이다. 

재일민단은 1일 도쿄 미나토구 민단본부에서 이병기 주일대사와 오공태 민단 단장 등 약 150명이 참석한 ‘90주년 관동대지진 희생동포 추념식’을 열고 희생된 동포들의 넋을 기렸다.




“한국, 유골도 못찾은 유족들 위해 일에 조사 요구해야”

ㆍ니시자키 시민단체 ‘봉선화’ 대표 조선인 대학살 증언집 출간

“대학살이 벌어진 지 9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희생자의 유골조차 찾지 못한 유족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유골조사를 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1923년 9월1일 발생한 간토(關東)대지진 90주년을 맞아 당시 도쿄 일대에서 자행된 조선인 대학살을 보여주는 3권의 증언집을 만든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 대표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53·사진)는 지난달 30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희생자 유골조사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지난 6월 한국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가했다가 한 한국인으로부터 간토대지진 당시 행방불명된 할아버지 유골을 찾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의 할머니는 대지진 이후 행적이 묘연해진 할아버지의 유골이라도 찾아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니시자키는 “대학살이 식민지시대 일본에서 발생했고,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실체규명 작업이 어려웠고, 이런 사정이 한국 정부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최소한 아직도 유골을 찾아 헤매는 상당수 유족들의 한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군대는 조선인들을 모아 집단·집중적으로 학살했다. 경찰은 유언비어를 이용해 주민들에게 무장을 촉구하며 학살을 조장했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학살이 벌어진 해 일본 의원 2명이 정부를 추궁했지만 당시 총리가 ‘지금 조사 중’이라고 답변한 이후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않았다.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대체제 속성상 옛 일본 군부에 조선인 학살과 관련한 문서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고, 경찰도 피해자 신원을 파악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자료가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주요 문서를 소각할 당시에 함께 태워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민간의 증언을 모으는 것 외에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중학교 영어교사 출신인 니시자키가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1982년이다. 대학 재학 중 한국어 공부를 계기로 재일조선인들과 친구가 되면서 그들의 쓰라린 삶에 눈길이 갔다. 시민들에 의해 조직된 ‘희생자 유골 발굴 모임’에 참여하면서 본격 뛰어들었다. 교사를 그만둔 이후에는 도쿄의 공립도서관을 뒤져 회고록, 일기 등에서 증언을 모아 자료집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