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벚꽃들로 도쿄 시내 곳곳이 파스텔톤으로 물들었다. 집 근처 센조쿠이케(洗足池) 공원의 벚나무들은 여느 해보다 탐스러운 꽃송이를 뽐내며 상춘객들을 반긴다. 하지만 만개한 벚꽃을 즐길 시간은 불과 며칠뿐이다. ‘꽃놀이’의 여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길바닥에 연분홍 자국을 남긴 채 벚꽃들은 스러져간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며 읊었다는 이 시구는 벚꽃에도 딱 어울린다. 찰나여서 아름다운 건지, 아름다움이 원래 찰나일 뿐인지 구분이 안간다.
센조쿠이케
도쿄특파원 임기를 시작하던 3년 전만 하더라도 한·일관계는 만개한 벚꽃이었다. 정식근무를 시작한 지 닷새 만에 겪은 3·11 동일본대지진을 취재하느라 경황이 없던 중에도 한국인들이 일본을 동정하고 격려한다는 소식에 흐뭇해하던 기억이 남아있다. ‘간바레(힘내라) 일본’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쓰였고, ‘단군 이래 처음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믿겨지지 않을 모금 열풍도 불었다. K팝 스타들의 출연료에 거품이 끼었다는 말이 나오고, 민영TV의 한류드라마 편성이 과다하다는 항의시위가 벌어질 만큼 한류붐이 상한가를 쳤다. 도쿄의 코리아타운인 신오쿠보 거리는 관광객들이 인도를 가득 메워 통행이 쉽지 않았다. 당시에도 인터넷 공간에는 ‘하이톤’의 대일 비판이 존재했지만, 과도한 증오감을 부추기는 액션에는 스스로 제동을 걸 정도로 일본을 보는 시선엔 여유가 느껴졌다.
당시 일본은 20년 넘는 장기침체의 시름에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기세에 놀라 이웃 한국의 옷소매를 움켜쥐려던 시점이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길을 떠났다 100년 만에 돌아온 일본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내놓으며 훌쩍 자란 이웃들과 공존공영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심술궂은 봄비에 찰나처럼 지는 벚꽃처럼 한·일관계는 2012년 여름 극적으로 파탄했다. 헌법재판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판결 등 전조는 엿보였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독도 방문은 일본에 격진을 몰고 왔고, 뒤통수를 맞은 일본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실효적 지배’를 유지하며 조용한 외교를 꾀해온 외교당국도 궁지에 몰렸다.
일본 우익들은 발호했고, ‘재특회’로 불리는 우익 단체들이 신오쿠보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서점에 대거 등장한 증한(憎韓) 서적들이 한국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한 일본인들을 ‘계몽’했다. 독도 방문 넉달 뒤 열린 총선에서 정치권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권력을 잡았다. 그 여름 이후 한·일 관계는 글자 그대로 ‘동결’됐다.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모처럼 만난 두 정상은 사진만 찍고 헤어졌고, 안 하느니만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은 아마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1년 뒤면 국교정상화 반세기를 맞게 되지만 말조차 꺼내기 머쓱한 상황이다. ‘한·일관계 회복의 묘안은 뭘까?’ 특파원 임기의 절반쯤 붙들었던 화두지만 만족할 만한 답은 얻지 못한 채 떠나게 됐다.
“한·일관계가 나쁘다지만 그게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이렇게 만나 술 한잔하면 되는 거 아냐?”
어제 작별인사를 위해 찾은 집 근처 단골 술집에서 동네 주민의 말을 들으며 정치는 ‘찰나’이고, 사람 간의 교류는 ‘영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었다곤 하지만 지금도 매년 수백만명이 양국을 오가며 정치와 언론의 ‘프리즘’으로 굴절된 이웃의 민낯을 확인하고 돌아온다. 3년간의 일본 근무도 ‘찰나’이지만, 이곳 사람들과 나눈 정은 시공간을 넘어설 것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느긋하고 꾸준하게.’ 이웃과 사귀는 데 서투른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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