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자메모/대지진 이후 3년간의 일본  

서의동 2014. 3. 6. 18:58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 발생 직후 일본에서는 ‘전후(戰後)’를 폐기하고 ‘재후(災後)’체제를 열어야 한다는 담론이 한때 주목받았다. 동일본대지진은 복원이나 부흥이 아닌 ‘국토창조’를 염두에 둬야할 정도의 사태여서 이를 감당하려면 ‘전후정치’라는 틀을 벗어나야 한다(정치학자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는 논리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고도성장을 구가해 오다가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로 한계에 봉착하면서 전후질서 청산을 모색해왔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일본대지진의 충격이 전후질서를 ‘강제종료’하는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해왔던 것이다.

 

일본의 전후체제는 성장경제와 평화주의라는 두 개의 바퀴에 의해 굴러갔다. 이 가운데 성장경제를 뒷받침해온 핵발전이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내면서 ‘핵발전 성장노선’에 근본적인 물음이 생겨났다.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가 급진전되는 일본에서 자연과 생명에 악영향을 미치는 원전을 유지하며 성장할 이유가 있느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본이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원전사고 이듬해인 2012년 7월 17만명의 시민이 운집한 ‘탈원전 집회’에서 여류작가 사와치 히사에(澤地久枝)가 한 말은 재래형 성장주의와 ‘대국 강박증’에서 벗어나 작더라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시민들의 열망이 함축돼 있다.

 

이런 흐름에 맞서 보수세력들은 중국과의 갈등의 핵이 되고 있는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를 국유화하며 대외갈등을 국내정치로 끌고 들어왔다. 관심이 중·일갈등으로 쏠리면서 ‘원전마피아’, 즉 원전을 둘러싼 정·관·산 유착구조는 위기를 넘겼다. 장기불황하에 동일본대지진을 맞은데다 중국·한국과의 갈등이 겹치면서 ‘강한 일본’을 희구하는 내셔널리즘도 확산됐다. 이런 점에서 ‘구체제’로 상징되는 자민당이 3년여 만에 화려하게 재집권할 수 있는 토양을 동일본대지진이 제공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평화헌법 개정,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내걸며 또다른 각도에서 전후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패전을 계기로 만개한 일본의 평화체제는 70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전후를 극복하려는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도쿄 나가타초(永田町) 총리관저 앞에서는 매주 금요일 탈원전 집회가 열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탈원전’ 여론은 과반을 유지하고 있다. 후세의 삶을 위해 현세의 에너지를 줄이겠다는 인식이 정착되면서 일본은 3년간 원전 10기 분량의 전력사용량을 줄였다. ‘대국부활’을 꿈꾸며 원전을 다시 돌리려는 아베 정권의 열망이 실현되기가 그리 순탄치 않아 보이는 이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