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가상소설 <원전(원제는 원발) 화이트아웃>을 보면 핵발전소 사고가 얼마나 다양한 변수로 촉발될 수 있는지, 또 인간의 대응은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섣달그믐날 밤 일본 동해안에 지어진 원자력발전소의 송전탑을 테러범들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한다. 원전이 긴급정지해 50만 가구에 전력공급이 중단된다. 발전소 측은 비상용 전원으로 원자로 긴급냉각에 나섰지만 배터리 부족으로 중단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 비상전원이 쓰나미에 휩쓸리면서 사고를 키웠다는 반성으로 원전 주변 고지대에 외부전원차가 설치됐지만, 아이로니컬하게 눈보라로 고지대에 접근할 수 없어 무용지물이 된다. 정부가 다음날 “원자로 냉각이 중단됐다”고 발표하자 주민들은 앞다퉈 탈출을 시도한다. 일거에 쏟아진 차들로 도로는 주차장이 돼 버렸고, 일부가 중앙차선을 넘어 반대 차로로 탈출하다 마주 오던 차량들과 부딪치면서 일대가 불바다가 된다.
바로 이책
일본의 현역 관료가 익명으로 쓴 이 소설은 전력회사와 정치권, 정부의 유착에 의해 원전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내부고발’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밀해 일본 관가를 긴장시켰다. 테러로 파국을 맞은 원전은 일본 정부가 재가동을 추진 중인 가시와자키가리와(柏崎刈羽) 원전이 모델로 추정된다. 2007년 지진으로 변압기가 불탄 적이 있는 이 발전소는 ‘두부 위에 지어진 원전’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연약지반이기도 하다.
이런 원전사고가 한국에서 일어난다면? 국토면적 대비 원전용량의 크기를 나타내는 원전밀집도가 세계 1위인 현실을 고려하면 대형 원전사고가 한차례만 발생해도 한국은 파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된다. 작가 김성종이 최근 소설에서 고리원전 폭발로 패닉에 빠진 부산의 상황을 실감나게 그렸듯이 사고가 날 경우 부산권의 500만명 인구가 한꺼번에 도시를 탈출하기란 불가능하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미흡하다. 지난 5월 국회에서 통칭 방사능방재법이라고 불리는 ‘원자력시설 등의 방호 및 방사능 방재대책법’이 통과됐다. 원전 반경 8~10㎞이던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20~30㎞로 다소 확대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에서 40㎞가량 떨어진 이다테무라(飯館村)지역이 사고가 난 지 3년이 넘은 지금도 ‘유령마을’임을 생각해 본다면 안이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사고 대응 대책도 ‘시늉’에 가깝다. 고리원전의 반경 30㎞에 부산·울산시민 320만명이 모여살고 있지만 지난해 원자력안전위가 낸 연차보고서를 보면 영남권에서 확보된 방사성물질 세슘 치료제는 10~300명의 치료만 가능한 분량이다. 원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1차 대피소의 수용인원은 2만9000명에 불과하고 가장 먼 대피소가 원전에서 17㎞ 떨어져 있을 뿐이다. 대피도로들도 대부분 왕복 2~4차로여서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교통체증이 극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마디로 대량의 인구가 심각한 피폭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주일특파원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3년간 취재해온 경험을 토대로 평가하자면 한국의 방사능 대책은 극히 부실하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원전 비중을 2035년까지 29%로 늘리겠다며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 중이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강원 삼척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그나마 청량감을 준다. 삼척시 근덕면 일대에 원전을 지으려는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고 지난 6월 당선된 김양호 시장이 원전 건설의 수용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 나서기로 했다. 척박한 ‘탈원전 토양’을 바꿀 ‘밀알’이 뿌려진 셈이다.
“한국도 중요한 사회 문제들이 있고,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환경의 책임 있는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방한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한 연설에는 ‘자연환경의 책임 있는 관리’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교황은 신고리원전을 연결하는 전력 송전탑의 건설을 반대해온 경남 밀양 주민들을 18일 명동성당 미사에 초청했다. 교황은 한국이 우격다짐식으로 추진 중인 원전정책과 그로 인한 주민 고통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의 ‘탈원전’ 메시지가 한국에서 결실을 거둘 수 있을까? 우선 삼척에 눈길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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