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도시마을이 성공하려면

서의동 2014. 10. 12. 21:30

얼마 전 일본 기자와 만났다가 몇년 전 대기업의 빵집 진출 문제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다 제동이 걸렸던 일을 설명했더니 그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우선 일본에선 대기업이 빵을 만들지 않는다. 설사 만들더라도 소비자들이 사먹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네가게에서 몇대째 이어오며 만들어 파는 가게의 빵이 더 맛있기 때문이다.” 그리곤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 빵은 아마 대기업이 파는 빵보다 비쌀 것이다.”

일본과 한국 간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는 골목가게들도 그중 하나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도 서비스 분야에서 대기업이 주도하는 프랜차이즈가 늘어나고는 있다. 덮밥집인 요시노야(吉野屋)와 스키야에 돈가스집 체인인 가쓰야 등이 저가격을 무기로 시장을 키워간다. 하지만 시내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특파원 체류 당시 거주했던 도쿄의 집근처 상가에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경(輕)양식집을 비롯해 채소가게, 고깃집, 서점, 문방구, 옷수선집, 선술집 등이 올망졸망 늘어서 있었다. 상가 2층에 있는 경양식집은 침침하고 인테리어도 낡아 장사가 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감히’ 문을 열지 않는 날도 꽤 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손님들로 북적인다. 전철역 주변 작은 상가골목에는 수십년간 닭꼬치구이를 파는 노인이 있다. 가격은 바로 옆 편의점의 닭꼬치보다 20%가량 비싸다. 하지만 돈을 좀 더 주더라도 마을을 수십년간 지켜온 할아버지의 닭꼬치를 팔아주며 요즘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정을 나누는 쪽을 선호하는 주민들도 여전히 많아 보인다.

경제행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곳 주민들의 소비행태는 비합리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비싸게 물건을 사더라도 결과적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유지되는 쪽을 그들은 바라는 것 같다. 장사가 안돼 동네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주민들이 떠나 동네가 쇠락해가는 것을 원치 않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다.

매년 9월이면 동네에선 대대로 이어져온 마을축제가 열리는데 종류와 규모는 대단치 않다. 하지만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축제를 기획해 치른다. 아이들은 부모와 동네 어른들이 만든 축제에 참가하며 자연스럽게 지역 커뮤니티에 대한 애착을 키워간다. 일본 사회가 급변동 없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온 데는 생활터전인 지역 커뮤니티가 사회의 허리를 튼튼히 받쳐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도쿠시마 현 서부에 위치한 오보케 마을 전경


물론 한국과 일본을 단순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 전쟁을 거치면서 마을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반면 일본은 수백년간 주민들이 ‘무라(村)’로 불리는 마을에 속박돼 살아왔다.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패전하면서도 오키나와를 제외한 본토는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집값이 급등하면서 전·월세를 감당하기 어렵거나, 투기로 한몫 잡으려는 이유로 집을 옮기는 현상이 빈번했다.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학군이 좋거나 학원가가 발달한 동네로 이주하는 ‘교육난민’들도 지역 커뮤니티가 성장할 기회를 가로막았다.

2000년대 중반에 휘몰아쳤던 ‘뉴타운’ 개발의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자치단체들의 도시정책이 ‘재생’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서울의 숭인·창신지구처럼 뉴타운 지구가 해제돼 도시재생 지구로 편입되는 곳들도 생겨난다. 단순히 마을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차원을 넘어 도시마을에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지역 커뮤니티를 구축하려는 지혜도 모아지고 있다. 지난 11일 부산의 대표적인 산동네인 닥밭골에서 주민들이 직접 기획한 축제가 처음으로 열린 것은 이런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지역 커뮤니티가 정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골목상권을 파고들려는 대기업들의 탐욕이 있고, 장시간 근무로 마을문제를 돌아볼 여유가 적은 것도 걸림돌일 것이다.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난민은 언제든 생겨날 수 있다. 아예 대안학교를 만든 성미산 마을의 사례를 다른 도시마을에 적용하기도 쉽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진보교육감들이 내놓은 ‘일반고 전성시대’ 정책에 기대가 쏠린다. 단시일 내엔 어렵겠지만, 공교육이 성공적으로 정상화된다면 내가 자란 정든 마을을 떠나려는 이들이 크게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