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3.11

서의동 2014. 6. 6. 16:56


2011년 3월11일은 경향신문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해 정식 근무한지 엿새째 되던 날이다. 그 전날 처제부부가 2박3일 일정으로 도쿄에 놀러와 있었고, 밤에는 아내와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가 단신부임으로 있는 나를 위문하기 위해 서울에서 2박3일의 일정으로 올 예정이었다. 3년간의 특파원 근무 준비를 위해 2월 중순부터 일본에 와있었으니 한달 좀 못되게 이국땅에서 홀로 지내다 모처럼 가족과의 상봉을 앞둔 기분좋은 금요일이었다. 

 

도쿄시내 중심부인 오테마치역 부근


이틀전의 심상치 않은 '전조'


오후 2시46분. 석간신문을 사기 위해 도쿄 중심부인 지요다(千代田)구 오테마치(大手町) 산케이빌딩에 있는 경향신문 도쿄지국의 사무실을 나와 오테마치역 지하도로 발길을 옮기던 길이었다. 2~3m 앞 천장에 있는 신호표지판이 조금 흔들린다 싶었다. 


순간 머리속에 지진으로 신주쿠 도청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이틀전 기사가 떠올랐다. 기사에서 읽은 ‘장주기지진동(長周期地震動)’이란 생소한 용어도 기억났다. 장주기지진동이란 지진의 주기가 길고 천천히 흔들림에 따라 진원에서 150~200킬로 정도의 먼 지역으로도 진동이 퇴적층을 타고 전파되는 것을 말한다. 특히 고층건물일 경우 지반과의 공진효과로 상층부가 길게는 몇분이상 지속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최초의 흔들림에 가벼운 긴장을 느끼면서도 ‘이러다 곧 그치겠지’하는 생각은 2~3초도 지나지 않아 공포로 바뀌었다. 지하도 바닥이 서있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흔들렸던 것이다. 길가던 여성들이 기둥을 붙잡은 채 “어떡하지(どうしよう)?”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행인들도 발걸음을 멈춘 채 벽을 붙잡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흔들림이 3초를 넘어서자 공포 엄습 


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여서 진도 3도 가량의 지진은 자주 일어나고, 대체로 1~2초 가량 흔들리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흔들림이 3초 이상 넘어가면 공포가 커진다. 1995년 간사이 지방을 강타했던 한신대지진은 불과 12초간 흔들렸지만 6000여명이 숨지는 대참사를 몰고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날은 6분 가량 흔들렸다. 

 

지하도에서 본 일본인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는 평소 모습과 달랐다. 지하철 마루노우치(丸の内)선, 지요다선, 한조몬(半蔵門)선, 미타(三田)선 등이 정차하는 오테마치(大手町)역 지하도에서 긴급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지금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모든 역무원은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지하도는 안전하니 승객들은 침착하게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들이 비상점검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지하도의 행인들은 한 상점에서 켜놓은 TV 앞에 몰렸다.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통화를 시도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나도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불통이었다.운행을 멈춘 에스컬레이터 계단으로 뛰어올라 황급히 건물바깥으로 빠져나가 보니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수십명의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거렸다. 


그 침착하던 일본인들이... 


거리 전체가 금연지역인 지요다구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일본인들이지만 때가 때인 만큼 일부는 담배를 꺼내 물기도 했다. 산케이빌딩의 인접 건물에는 전원이 건물 밖으로 대피해 건물 앞 광장에 모여 있었다. 흰색 안전모를 쓴 채 메가폰을 든 한 건물관리인은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것보다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며 만류했으나 당황한 시민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사무실이 있는 9층까지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벽 여기저기에 페인트가 벗겨진 게 눈에 띄었고 곳곳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당수 회사원들이 짐을 싸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비상계단으로 몰렸다. “도쿄 도심에서 좀체 겪어본 적 없는 지진”이라는 말들이 들려왔다. 


사무실에 돌아와보니 책상서랍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사무실이 지속적으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마치 배처럼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1시간 이상 반복됐다. ‘장주기지진동이란 게 이런 건가’라는 실감이 들었다.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흔들리자 ‘사무실에 있어야 할지,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결국 그날 9층 사무실을 비상계단으로만 네번 왕복했다. 휴대전화에 있는 보행계는 그날 하루만 1만6000보를 걸은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공중전화 거는데 40분 


본사 보고를 위해 수화기를 들고 국제전화를 걸었지만 “지금 전화가 폭주하고 있어 연결이 어렵다”는 자동응답만 들렸다. 인터넷은 그나마 연결이 돼 있어 메신저로 회사에 상황을 보고했다. TV에서는 안전모를 쓴 아나운서들이 긴급한 표정으로 피해상황을 내보냈다. 


“여러분 절대로 혼자 있지 말고, 물건이 올려져 있는 곳에는 접근하지 마세요. 가스렌지와 전기기구를 확인하시고, 깨진 유리창이 있을지 모르니 집에서도 신발을 신고 계세요. 콘센트에 플러그가 꽂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바닷가에는 절대 접근하지 마세요….” 


안전모를 쓴 방송국의 여성 아나운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피요령을 안내했다. 도쿄 시내구경을 나섰던 처제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와 “어떡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휴대폰이 불통이 되자 사람들이 공중전화에 몰리는 바람에 40분을 기다렸다고 한다. 방법이 없어 “전철 다니는 곳을 확인해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장 속에 서둘러 기사를 보낸 뒤 평소 알고 지내던 산케이신문 문화부 기자 기타 요시히로(53)를 만났다. 일본인들의 표정을 인터뷰 기사로 쓸 참이었다. 기타는 집이 사무실에서 30㎞쯤 떨어진 지바현 후나바시에 거주하는데, “전철이 끊겨 오늘 집에 가긴 틀렸다.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녁을 건물에 비축돼 있는 비상식량인 건빵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기업과 관공서는 지진에 대비해 비상식량을 비축해두고 있다. 거리에 있는 안내지도에도 어느 건물안에 비상식량이 있는지 표지가 돼 있다. 자연재해가 반복돼온 일본다운 대비책인 셈이다. TV에서는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관방장관의 “무리해서 귀가하지 말고 회사 등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당부가 흘러나왔다. 


지하철은 심야에 운행재개 


그날 JR철도는 운행이 전면중단됐으나 자정을 넘어서면서 지하철은 일부 구간부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소 JR을 이용해 50분 정도 걸리던 통근거리가 지하철로 우회하는 바람에 두시간이나 걸렸다. 12일 오전 0시30분. 우선 오테마치에서 지하철 한조몬선을 타고 9번째 역인 산겐자야(三軒茶屋)에 도착한 뒤 도큐덴엔도시(東急田園都市)선으로 갈아타고, 4번째 역인 후타고타마가와(二子玉川)역에서 내렸다. 


다시 도큐오이마치(東急大井町)선으로 갈아타고 9번째 역 하타노다이(旗の台)에 멈춘 뒤 다시 도큐이케가미(東急池上)선을 타고 6번째역인 구가하라(久が原)에 도착했다. 무려 28개역을 거치면서 도쿄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모양인 데다 지하철은 운행점검을 위해 저속운행을 했다. 집 근처 역인 구가하라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20분.

 

우리집 근처인 구가하라역에 전철이 들어오고 있다.



가족은 공항로비에서 밤지새 


집에 돌아와 보니 책장에서 책이 쏟아져나와 있을 TV가 쓰러지거나 그릇이 깨지는 등의 손상은 없어 다행이었다. 전날 도쿄에 놀러왔던 처제 부부는 1시간 쯤 먼저 귀가해 있었다. 신주쿠의 카페에 있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뛰쳐나가길래 따라나가 우왕좌왕하다가 역구내에 쭈그리고 앉아있거나 철로를 따라 걷거나 하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다. 처제는 12시간 동안 슬리퍼로 다니느라 무릎이 상해 이후 등산을 할 수 없게 됐다. 

 

아내와 아이는 이날 밤 10시에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했는데, 새벽 2시까지 택시를 기다리다 포기하고, 공항직원들이 나눠주는 구호용 담요를 2개 받아서 로비에 깔고 잤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모노레일을 타고 하마마쓰초(浜松町)역까지 와서 JR게이힌도호쿠(京浜東北)선으로 갈아탔으나 전철이 시험운행하느라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평소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5시간여 걸려 12일 오전에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