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내가 겪은 후쿠시마 3년

서의동 2014. 5. 23. 14:33

“일본이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2012년 7월16일 도쿄시내 요요기(代代木) 공원에서 17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사요나라 원전’ 집회에서 당시 81세의 여류 작가 사와치 히사에(澤地久枝)는 “작은 국토이지만 일본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며 이렇게 호소했다. 사와치의 말은 일본에서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지난 3년간 필자에게 가장 인상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원전사고가 난지 1년 뒤인 2012년 3월초 후쿠시마현에 취재갔을 때 찍은 사진. 일본공산당이 세워둔 탈핵 포스터.



“사요나라, 원전!”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과 동시에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방사성물질 대량유출사고는 일본 사회에 격진을 몰고 왔고, 그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영향은 아직도 가늠하기 쉽지 않다. 3년이 지나면서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 준비에 한창이고, 일본 주류 언론에서도 원전문제는 거의 자취를 감출 정도로 외견상 후쿠시마의 악몽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하지만 원전사고를 유발한 ‘원전마피아’의 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원전을 다시 돌리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 ‘대사변’은 전후(戰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하에 원전을 전력원으로 사용해온 세계 각국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문제이며 사와치의 말은 현대 인류가 원전을 동원한 성장전략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한국도 외면할 문제가 아니다. 한편으로 필자가 도쿄특파원 업무를 시작한지 불과 닷새뒤 벌어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3년간 한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실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종교문제화’한 방사능 피폭


지난 3월 하순, 평소 알고 지내던 출판사 직원 Y씨 등과 도쿄 가구라자카(神樂坂)의 한 일식집에서 송별점심을 했다. 3년간의 특파원 생활을 돌아보다 한달전 다녀온 후쿠시마(福島) 출장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필자의 취재경험을 열심히 듣고 난 Y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얘기 오랫만이네요. 일본에선 방사능 문제는 종교 문제와 비슷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요”라고 대꾸했다.


무슨 뜻일까? “왜 좌중에 특정 종교의 신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종교에 대한 험담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가끔 있잖아요? 방사능 이야기도 좌중에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발생한 피폭량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지 모르니 말을 꺼내기가 꺼려지는 거죠. 그러다보니 자연히 방사능 이야기는 화제에 오르지 않게 돼요.”


Y씨는 5살난 사내아이를 둔 아이엄마여서 원전사고 직후에는 방사능에 꽤 민감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피폭에 대한 우려는 퇴색한 듯 보였다. 필자같은 외국인, 그것도 뉴스를 다루는 저널리스트와 만나는 과정에서 가끔씩 자극을 받는 정도가 고작인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일본 사회속에서 ‘합리적인 의문’이 싹틀 여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후쿠시마를 떠난 ‘자주(自主) 피난민’


하지만 방사능에 대한 인식은 도쿄에서 200㎞가량 떨어진 후쿠시마로 가면 확연히 달라진다. 지난 2월 하순 동일본대지진·후쿠시마원전사고 3년 취재를 위해 전직 고교교사 다케다 도루(武田徹·73)씨 일행과 후쿠시마 역에서 만나 현 일대를 동행하며 현지사정을 취재했다. 


다케다씨는 사고 당시 후쿠시마를 떠나 인접현인 야마가타(山形)현 요네자와(米澤)시에서 3년째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일본인중에서는 드물게 열정적이고, 정의감이 투철한 다케다씨는 “올림픽마저 유치됐으니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를 필사적으로 지우려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일명 ‘자주(自主) 피난민’이다. 일본 정부가 피난지역으로 지정한 원전주변 지역이 아닌, 원전에서 60㎞가량 떨어진 후쿠시마시에서 거주하다 사고를 맞아 피난한 것이다. 그런 만큼 3년이 지난 현재 반경 20㎞부근 지역까지 주민귀환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착잡하다. 후쿠시마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주피난자들을 ‘유난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후쿠시마 현에 거주하는 어린이와 여성들은 모두 일단 피난시켜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여전히 확고부동하다. 결혼해 후쿠시마에 살던 다케다의 딸은 사고직후 남편을 남겨두고 피난했다가 가끔씩 후쿠시마를 다녀가는 정도인데도 소변검사에서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다.

“사고 직후부터 후쿠시마 주민 전체 상대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해왔지만, 민주당도 자민당도 외면했다. 검사를 한다면 아마 후쿠시마 주민전체에서 세슘이 검출될지도 모른다. 그 감당을 하기 싫은 것이다. 3년이 돼도록 주민들 건강수첩도 안만들고 있다.”


피폭 경고는 비주류의 목소리로 치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지 3년이 지난 현재 일본인들의 방사능 피폭문제에 대한 태도는 이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Y씨의 말처럼 방사능 피폭은 과학적 판단보다는 ‘신념’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원전주변 지역은 위험하지만 적어도 도쿄 정도는 안전하다는 인식이 대세인 반면, 지난 1월 한국에서 강연을 가진 바 있는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교토대 원자력연구소 조교 같은 이들은‘저선량 피폭’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도쿄 정도의 방사선량이라도 피폭되면 유전자에 상처를 내 발암위험을 높인다는 그의 지적은 일본 주류언론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고이데류의 주장은 일본 사회에서 ‘비주류’의 목소리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분명한 것은 도쿄와 수도권의 안락한 삶을 위해 ‘폭탄’을 끌어안은 채 수십년을 견뎌온 후쿠시마 주민들의 삶이 해체됐다는 점이다. 이곳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거나, 피폭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떠날 여건이 안되는 주민들은 ‘원자력 실험실’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방사능과 평생 싸워야 한다. 


만약 한국에서 후쿠시마 급의 원전사고가 발생한다면, 한국 정부의 대응은 일본 정부보다 더 무책임할지 모른다.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사태를 보면 이런 예상은 지나치지 않다. 원자력이란 존재는 국가가 국민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고이데의 말을 분명히 새겨둬야 할 것이다.

 

취재대상이면서 실존문제였던 ‘방사능’


3·11동일본대지진 닷새전부터 특파원 임기를 시작해 3년여 동안 원전문제를 지켜봐온 필자에게 방사능 피폭은 취재대상이자 ‘실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대지진 사흘뒤인 3월14일, 도쿄에서 빌린 렌터카를 몰고 20시간 걸려 쓰나미피해지역인 미야기(宮城)현으로 취재를 떠날 때만 해도 방사능 문제의 심각성은 깨닫지 못했다. 이미 이틀전인 3월12일부터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가 폭발하며 방사성물질의 유출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는데도 실내가 더워 창문을 열어젖힌 채 운전했고, 도중에 후쿠시마시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기까지 했다. 


더구나 당시 출장목적은 쓰나미 피해의 참상을 보도하는데 있었던 만큼 원전상황은 관심사밖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관방장관의 “방사능 유출로 즉시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에 별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로 원전과 방사능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기도 했거니와 일본 정부를 어느 정도는 신뢰했기 때문이다. 4일간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귀환(렌터카를 현지 지점에 반납하고 비행기로 돌아왔다)한 뒤 원전사고가 주된 취재 대상이 된 이후 3년간 원전과 방사능은 언제나 머리구석 한켠을 떠나지 않은채 머물러 있었다.


돌아와서 본 도쿄의 상황은 흉흉했다. 특히 3월23일 도쿄시민들의 식수원인 카츠시카(葛飾)구 정수장에서 리터당 210베크렐(㏃)의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되자 시민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생수 사재기’를 우려해 당시 식료매장들은 가족당 생수 1병으로 판매를 제한하기도 했다. 


식품 공포 현실화


지인인 주부 고바야시 다카코(小林貴子·42)씨는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매일 자전거로 동네 편의점과 슈퍼마켓을 돌며 생수를 사모으는게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고 말했다. “2리터들이 생수를 3~4병 사모아도 남편과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다섯살과 세살 난 딸 둘까지 다섯 식구에겐 충분치 않아 생수와 수돗물을 반씩 섞어 미소시루(일본 된장국)를 끓인다. 쌀씻을 때는 수돗물, 차와 국은 생수를 쓴다. 수퍼에 가면 포장을 살펴 규슈(九州)나 니가타산 생선을 고른다.”


이후 3년 동안 필자는 수돗물을 피하고 생수를 사먹고 장을 볼 때도 원산지를 꼼꼼하게 챙기게 됐다. 단신부임으로 와 있느라 마음의 부담이 비교적 덜했다고는 하지만 ‘신경과민’ 상태는 지속됐다. 원전문제를 들여다보다 원산지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도 알게 됐다. 쌀의 원산지 표시의 경우 산지명을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각기 다른 산지의 쌀을 섞을 경우 ‘국산’으로만 표시해도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아침마다 사먹는 편의점의 오니기리(삼각김밥)는? 부랴부랴 다음날 아침 편의점에서 오니기리를 사 뒷면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국산’이었다. 


물론 원전사고 이후 아직 햅쌀이 나올 시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과민반응이긴 했다. 하지만 그해 7월 방사성 세슘에 오염된 볏짚사료로 키운 소가 학교급식과 열차 도시락 재료로 사용된 사실이 드러나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줬던 것을 감안하면 전혀 ‘기우’는 아니었던 셈이다. 실로 우려는 점차 현실화되면서 그해 11월에는 후쿠시마 농가의 햅쌀에서 기준치를 넘는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고, 12월에는 일본 최대 식품회사인 메이지(明治)의 분유 ‘메이지 스텝’에서도 세슘이 검출돼 일본 사회에 방사능 공포가 확산됐다.


홋카이도에서 시고쿠까지 방사능 확산


도쿄시내에서도 곳곳이 방사선량이 정부가 정한 연간 기준치(1밀리시버트(mSv), 1시간당 0.23마이크로시버트(μSv))를 넘는 ‘핫스팟(Hot-spot)’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10월에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반경 250㎞ 떨어진 요코하마(橫浜)시 고호쿠(港北)구의 아파트 옥상의 진흙 퇴적물에서 1㎏당 195㏃의 스트론튬 90과 6만㏃의 세슘이 검출됐다. 


그해 11월 나고야(名古屋)대 국제연구팀이 방사성 물질의 오염 확산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세슘이 일본 열도 북단의 홋카이도(北海道)부터 남부의 주고쿠(中國), 시고쿠(四國) 지역까지 퍼진 것으로 나타났다.


히로세 다카시(廣瀨隆)의 <원자로시한폭탄>과 고이데 히로아키의 <원전의 거짓말>같은 책을 부지런히 탐독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들의 지적과 정부의 공식설명, 주류언론의 보도와의 격차가 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대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건가’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방사능에 대한 감수성은 나이가 들수록 낮아지고 40대 중반 이후는 10대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대목을 읽은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점점 무뎌지는 방사능 경각심


솔직히 말해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필자의 방사능 피폭문제에 대한 인식은 확실치 않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저선량 피폭’을 경고하는 이들은 없지 않다. 지난해 10월 인터뷰를 위해 만난 게이오대학병원 의사 곤도 마코토(近藤誠)는 “방사능 피폭은 미량이라도 유전자에 상처를 내 발암위험을 증가시킨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일상에 젖으면서 필자의 방사능에 대한 경계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풀려갔다. 원전사고 1년후 후쿠시마를 취재할 땐 후쿠시마에 도착하자 마자 마스크를 사서 쓰고 다녔지만, 지난 2월 하순에는 마스크는 커녕 후쿠시마 시내 호텔에서 하루 묵으며 저녁식사까지 할 정도였다.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후쿠시마 지역의 상당수 지역의 방사선량은 아직도 일본 법률상 만 18세 미만 청소년들은 출입할 수 없는 ‘방사선관리구역’에 해당되는 수치다. 필자의 경험은 눈에 보이지도, 냄새도 맡을 수도 없는 방사능에 대처하가 그만큼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방사능 오염수 유출문제가 한국 사회에 수산물 파동을 몰고 오기도 했지만 정작 일본 사회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세계 각국의 핵실험으로 해양은 이미 상당정도 오염된 상태인 만큼 방사능 오염수 유출은 분명히 문제지만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전문가들도 있다. 오히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결정 하루전 일본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를 발표한 한국 정부의 조치를 ‘호들갑’이라고 항의하는 일본인들도 많았다. 


‘한국인들이 과민반응하는 걸가, 일본이 지나치게 무딘 건가, 아니면 일본인들도 걱정은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있는 걸까.’ 3년이 지난 지금도 방사능 피폭문제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에 태어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일본인들과 잠깐 여행오는 외국인, 필자처럼 수년간 주재한 뒤 돌아가는 외국인간의 방사능에 대한 태도는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사능 문제는 ‘실존’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고수습에까지 부작용을 미치는 ‘원전민영화’ 체계


방사능 피폭에 대한 일본의 애매한 태도 이상으로 필자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원전사고에 대한 일본의 대응방식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주식회사 체제인 도쿄전력에게 사고수습을 맡겨놓고 뒷짐만 지고 있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사고수습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도쿄전력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공사를 회피하는 등 철저한 기업논리로 움직이면서 사고수습을 지연시킬 뿐 아니라 문제를 키우고 있다. ‘국책민영(國策民營)’이라는 기이한 ‘민영화 구조’하에서 원전이 건설되고 운영돼온 것이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지만 이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 관료, 도쿄전력및 원전건설업체들이 이익을 나눠먹는 ‘겐시료쿠 무라(原子力ムラ·한국에선 ‘원전 마피아’로 불림)’의 강고한 구조는 인류사적 재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일본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이고도 별 효과가 없어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비판받는 방사능 오염제거(제염) 사업은 대부분 대형 건설업체들이 수주한다. 원전을 지으며 배를 불린 대형 건설업체들이 제염작업도 도맡으면서 이중으로 돈을 버는 셈이다.


사후대책도 ‘뒤집기’하는 도쿄전력의 힘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 오염수가 불어나는 사태와 관련해 원자력 전문가들은 사고 초기부터 원전 건물 둘레에 차수벽을 설치해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가 고여 있는 원전 건물에 지하수가 유입돼 섞이는 것을 방지하라고 지적해왔다. 


원전사고 2주 뒤인 2011년 3월26일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의 원전사고담당 보좌관에 취임한 마부치 스미오(馬淵澄夫) 민주당 중의원은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곧바로 오염수 대책에 착수, 두 달 뒤 차수벽 설치계획을 마련했다. 마부치 의원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월11일 현장을 방문해 당시 요시다 마사오(吉田昌郞) 현장소장과 차수벽 설치구역까지 획정했다”고 말했다. 


이 계획은 6월14일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2주 뒤 주주총회를 앞둔 도쿄전력은 막대한 공사비로 주주들의 비판을 살 것을 우려해 뒤집기 공작에 들어갔다. 무토 사카에(武藤榮) 당시 부사장이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당시 경제산업상을 만나 언론 발표를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공사비가 1000억엔대에 달하는 막대한 사업을 발표할 경우 시장으로부터 채무초과라는 평가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결국 언론 발표는 미뤄졌고, 대신 무토 부사장은 마부치 보좌관에게 “지체없이 추진하겠다”고 구두약속했다. 하지만 2주 뒤 도쿄전력의 주총이 열리던 6월28일 간 총리는 원전사고수습담당상을 신설해 별도의 인사를 임명했고, 차수벽 설치에 의욕을 보여온 마부치는 총리보좌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석연치 않은 인사에 도쿄전력이 간여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건 차수벽 계획은 유야무야됐다. 2년 전 즉시 공사에 착수했더라면 오염수 유출사태는 최소화됐을 것이지만 주주와 자본시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장기업의 경영논리가 사태를 최악으로 몰고간 것이다.


원전 노동자들은 현장의 ‘일회용품’


원전사고 현장에서 초심자들에 의한 실수로 사고수습을 지연시키는 것도 ‘사고수습 민영화’가 빚은 폐해다. 인류사적인 재앙인 원전사고를 수습한다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근로자들은 정작 현장에서는 일회용품으로 취급된다. 이 때문에 숙련된 근로자가 사라지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점검 요원들이 지난해 11월27일 후쿠시마현에 있는 후쿠시마 제1원전을 점검하고 있다. _ 국제원자력기구 제공·AFP연합뉴스


지난 2월말 만나 인터뷰한 후쿠시마 원전 해고근로자 고보(가명·30대중반)의 설명에 따르면 원전사고 현장은 원전운영사인 도쿄전력(발주기업)과 원청업체인 대기업, 그 아래 수많은 하청업체들이 다단계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핀하네(ピンハネ)’로 불리는 ‘임금 가로채기’가 횡행한다. 하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으니 멀리 오키나와, 홋카이도로부터 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방사선량이 시간당 수백밀리시버트(mSv)에 이르는 건물 내 잔해처리 작업 등에 동원됐다가 피폭돼 이르면 2주일 만에 해고된다. 



현재 원전노동자 지원단체에서 활동 중인 고보는 “사고현장은 일본의 불안정노동의 구조적 문제가 응축돼 있다. 다단계 하청구조하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다 버려지는 체제 속에선 온전한 사고수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근로자들이 자주 교체되는 탓에 오염수 유출, 정화장치 작동중단 등 실수에 따른 사고가 빈발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원전사고 수습을 국가적 과제로 인식한다면 도쿄전력이나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해 안정성을 높이고, 의료·생활보장 대책을 마련하는 등 노동환경을 대폭 개선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가 반복되면서 사고수습 작업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 밖에 없다.”

 

아쉬움이 남는 시민사회의 대응


원전사고 이후 일본사회의 의식은 크게 변했다. 아베 정권은 원전재가동에 필사적이지만 여론조사를 하면 재가동 반대여론이 절반을 넘는다. 일본근대사 권위자인 도쿄대 미타니 히로시(三谷博) 교수의 말을 빌면 “일본인들은 원전사고를 계기로 원자력이 ‘독’임을 체감했다.” 원전사고 3년을 맞은 지난 3월9일 도쿄도심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열린 집회에선 여전히 수천명의 시민들이 참가해 탈원전을 외쳤다. 


항의집회는 때가 되면 꾸준히 열리지만 정부의 정책을 바꿀 정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2012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중국과의 센카쿠(尖閣)열도 영유권 분쟁에 여론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탈원전’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그해 12월16일 일본 중의원(하원) 총선에서 탈원전 이슈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필자는 탈원전과 영토분쟁이 뒤섞이던 당시 상황이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탈원전 이슈가 표출된 뒤 반드시 영토문제가 불거지면서 여론의 관심을 덮어버리는 일이 되풀이 됐기 때문이다. 


우선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유신회 공동대표가 도쿄도지사 재임중인 2012년 4월16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 “민간인이 소유한 센카쿠를 도쿄도가 사들여 관리하겠다”며 중·일간 영토분쟁의 씨앗을 뿌린 시점이 묘하다. 대표적인 원전 찬성론자이기도 한 이시하라의 발언이 나오기 사흘전인 4월13일, 노다 총리는 각료회의를 열어 간사이(關西)전력의 오이(大飯)원전 2기를 재가동하기로 하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설득에 나서기로 하던 직후이기 때문이다.


원전보다는 영토분쟁으로 관심 돌리려는 정치인들


그해 7월7일에는 노다 총리가 ‘센카쿠 국유화’ 방침을 꺼냈다. 이는 20만명(주최측 추산)에 달하는 시민들이 총리관저 일대에 운집해 ‘원전 재가동반대’를 외쳤던 6월29일로부터 8일 뒤다. 이시하라와 노다의 주고받기가 중국을 자극하면서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9월에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수국혁명’이라는 이름까지 붙을 정도로 뜨거웠던 ‘탈원전’ 운동은 기세가 한풀 꺾였고 언론들도 관심을 접었다. 


영토갈등이 한창이던 9월 미국은 일본 정부가 추진하려던 ‘2030년대 원전제로’ 방안에 제동을 걸었다. ‘탈원전’ 이슈가 영토문제로 희석된 상황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거대한 모종의 힘이 작용한 결과인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다만, 원전사고를 겪은 시민사회에서 ‘쇼에네(省エネ)’로 불리는 에너지 절약의식은 급격히 고양됐다. 미타니 교수는 대지진 이후 일본의 변화에 대해 “정전으로 모두들 고생했지만, 그 덕에 절전인식이 정착됐다”고 했다. 기업들에 비해 다소 에너지 낭비적이던 가계의 생활패턴이 크게 달라졌다는 평가다. 


저에너지로 향하는 사회, 원전이 남긴 성과


기업들은 저에너지 주택인 ‘스마트 하우스’ 개발과 연비를 크게 낮춘 자동차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전력부족 사태를 겪은 소비자들은 후세의 나은 삶을 위해 다소 돈이 들어도 에너지절약형 상품을 선택하는 ‘사회적 소비’를 실천했다. ‘나쁜’ 에너지 대신 태양광과 풍력, 지열 등 ‘좋은’ 에너지의 비중을 늘리려는 민간차원의 노력도 본격화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은 지난 3년간 원전 20기분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였다. 도쿄신문이 사고 전인 2010년과 2012년의 8월 전력소비량을 비교한 결과 원전이 대부분 가동 중단되면서 원전 발전량이 90% 이상(240억㎾) 줄었고, 화력·수력을 포함한 발전총량은 120억㎾가 줄었다. 사고 전에 일본 전역에 40기 안팎의 원전이 가동 중이었음을 감안하면 단순 계산으로 원전 20기분의 발전량에 해당하는 절전이 이뤄진 셈이다. 


대지진 이후 3년간 이뤄진 절전 노력으로 일본은 원전 1기 안 돌리고도 혹한과 혹서를 거뜬히 넘기고 있다. 탈원전을 둘러싼 논란을 잠시 접고 본다면 일본의 ‘탈원전’은 미래의 꿈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일지도 모른다.


※녹색평론 2014년 5~6월호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