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표절과 한일관계

서의동 2015. 6. 22. 15:17

신경숙 표절사태를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한국의 표절관행은 '일본 캐치업(catch-up)'을 목표로 뛰어온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일본 베끼기'는 각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국제통화이금(IMF) 사태 이전만해도 정부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면 우선 일본의 법령이나 제도를 베껴 시안으로 깔아놓는 것이 순서이다시피 했다. 

 

한국사회에서 일본 것을 베끼는 데는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던 것 같다. 식민지배 35년을 경과하면서 경제, 사회구조가 일본형으로 재편된 특수상황에다 "일본은 우리에게 죄를 지었으니 일본 거 좀 베껴도 돼"라는 심리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가요계에서 일본 노래 표절시비는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의 2인조 여성그룹 핑크레이디의 <SOS>를 거의 베낀 <별 달 장미 백합>(김만수 노래)이다. 룰라의 <천상유애>가 닌자의 ‘오마츠리 닌자’를 표절했다는 의혹도 유명하다.(실제 들어보면 그렇게까지 표절인가 싶을 정도지만) 일본에 한류붐을 일으킨 <겨울연가>의 주제가도 일본 노래를 표절했다는 뒷말이 나왔다.  


출처 = thinkdifferent.tistory.com

 

제조업 분야에서도 표절시비가 많다. 새우깡, 빼빼로, 고래밥, 쵸코송이, 마이추, 음료의 17차(일본은 16차)가 일본 상품을 거의 그대로 모방했다. 일본 나고야에 있는 돈까스 전문점의 로고(돼지가 스모선수 복장을 한 로고)를 한국의 한 업체가 그대로 베껴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기업간에 공식적인 기술협력 사례가 많았지만 이런 것과 별개로 차용과 모방, 카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것을 표절하는 경향은 독특한 한·일관계와 무관치 않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뒤에도 양국간 문화교류는 크게 제한됐다. 일본 지상파TV에선 한국 드라마나 음악이 여과없이 소개되지만, 한국 지상파는 일본노래와 일본 드라마를 방영할 수 없다. 만약 한국인들이 일본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앞에서 예시한 말도 안되는 표절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1980년대 후반까지는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제한됐다. 

 

표절은 한마디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일본문화의 '빗장'은 닫혀 있고, 거리는 가깝다 보니 일본에 가서 이거저거 쇼핑하거나 구경한 뒤에 모방품을 만들어 내면 바로 팔리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런 관행은 문화계에서 상당기간 죄의식 없이 남아 있었다.  


어렸을 적 즐겨보던 <마징가제트> <은하철도999> <마린보이>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사례도 재밌다. 공식적으로 일본 문화를 수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방송사들이 수입하도록 허가했고, 그 조건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시청자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다. '눈가리고 아웅'식이다. 김국환이 부른 <은하철도999>의 주제가는 마상원 작곡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 버전의 주제가(사사키 이사오 노래)와 중반까지 거의 같은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표절을 조장하다 보니 일본의 문물은 마음대로 베껴도 죄의식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 수십년간 지속된 것이다.  


해방이후 ‘일본을 따라잡자’는 의식은 한국이 빠른 시일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됐다. 하지만 ‘빨리빨리’ 가져와 모방하는 성장과정은 수십년이 지난 현재 우리에게 장애물이 된 듯 하다. 독창성을 기를 ‘성장판’을 닫아버린 것이다. 

 

일본이라고 베끼기 관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자업종 분야에서 소니같은 일본 기업들이 미국 제품을 들여와 뜯어보면서 모방품을 만들어낸 사례가 분명히 있다. 캐치업 단계에서는 세계 공통의 현상이기도 하거니와 '모방-혁신-창조'라는 흐름을 밟아가는 초입단계에서는 불가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제는 벌써 졸업했어야 할 모방단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이 아이폰을 베낀 갤럭시를 출시한 뒤 소송에 시달리며 '카피캣'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상황이 이를 대변한다. 일본 모노즈쿠리의 강력한 자장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과 시간을 들여 우리 고유의 것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풍토였기 때문이다.  


일본을 관찰해보면 가업을 몇대째 계승하면서 한우물을 파다가 독창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사례가 많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궁리하면서 혁신적인 개량품이나 전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다. 일본은 1853년 미 페리제독에 의한 개항이전에 상당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정치사회구조가 상업과 기술을 존중하는 풍토였다. 이 때문에 모방단계를 빠르게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우리는 사정이 달랐다. 조선시대부터 기술과 상업을 천시하는 분위기에다 해방과 전쟁이후에는 빠른 복구를 위해 뭐든지 대강 그럴싸하게 만들어 빨리 파는 방식이 더 선호됐고 또 성공을 거뒀다. 그중 빠르고 손쉬운 길 중 하나가 베끼는 것이고 바로 옆나라에 우수한 물건들이 많으니 가져다 쓰면 됐던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가 해방이후에도 상당기간 온전하게 기능해왔던 점도 있다. 요컨대 ‘노하우’ 대신 ‘노웨어(know-where)’가 한국에선 더 중요했다.

 

학계에서도 먼저 이런 풍토는 문화계 뿐 아니라 산업계, 학계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도 일본이 지리적으로 너무 가까웠고, 식민지배까지 받았던 것은 한국에 엄청난 마이너스였다. 



사과의 말씀


내용중의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었네요. 빼빼로데이는 한국이 먼저였고, 일본 애니메이션 배경음악의 경우 일본음원협회에 패키지로 저작권료를 지불한다는 독자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확인해보니 빼빼로데이는 97년부터 롯데가 마케팅을 시작했고, 포키는 해당회사인 에자키그리코가 1999년 11월11일을 포키데이로 지정한다고 홈페이지에 공시했습니다. 애니메이션 배경음악의 저작권료 지불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일단 지적이 있어서 해당부분을 삭제했습니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글을 올린 점을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