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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의 사람·사이-구수정][전문]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죄·배상,우리는 일본처럼 하면 안돼

서의동 2017. 4. 24. 14:23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강윤중 기자

중국에 오래 거주해온 생면부지의 사업가가 지난해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구수정(51)을 찾아와 후원금 5만달러를 내놓고 갔다. 신문을 보다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처음 접하고 받은 충격이 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됐던 모양이다. 지난 5일에는 ‘부족하나마 용서받고자 하는 곳에 쓰여지기를 바란다’는 손편지가 재단 사무실로 배달됐다. 충북에 사는 발신인은 기초생활수급자인 2급 장애인.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형편인데도 매달 3만원 후원을 약정했다.  

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구수정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려온 지 19년째가 되지만 여전히 처음 듣는다는 이들이 많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던지고, 동시에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다”고 했다. 구수정은 베트남 유학 시절인 1999년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처음 한국에 알렸고, 이후 전개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해왔다. 지금은 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 주교)의 출범준비로 바쁘다. 구수정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국제사회에서 언제든 다뤄질 수 있는 전쟁범죄이자 반인륜·반인도적 사안”이라며 “다음 정부가 우선 진상규명에 나선 뒤 사죄·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는 4시간20분 동안 진행됐다. 


■‘어디서 저리 많은 눈물이 나왔을까’

- 한베평화재단 출범식은 언제 가질 계획인가. 

“설립인가는 2월에 받았고 출범식은 9월에 하기로 했다. 오는 26일 종전 기자회견 겸 베트남 피에타상 제막식을 제주 강정에서 가질 계획이다. 베트남의 아픔과 제주의 아픔이 만나는 의미가 있다.” 한베평화재단은 1999년부터 이어온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지속가능한 평화운동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 일반인들의 참여는 어떤가. 

“매일매일 감동이다. 얼마전 어떤 분이 손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기초생활수급자이자 2급 장애인이고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생활하는 분이다. CMS로 월 3만원을 후원하시겠다고 해 ‘너무 부담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한베평화재단에 후원하기 위해 일간지를 끊었다’고 하더라. 한국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 몇분도 CMS에 가입했는데 ‘여러분이 하는 일이 감동적이고,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될 거 같아 작지만 후원한다’는 편지를 보내셨다. CMS 회원들은 대개 월 1만원이 대부분인데 이주여성들은 약속한 듯 매달 2만원을 약정했다. 대학생 때 한베평화캠프에 참가했던 이들중에서 취업한 이들도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굉장히 큰 힘이 된다.”


- 지난해 학살 50주기 위령제가 치러졌는데 현지에선 어떤 방식으로 추모가 이뤄지나. 

“위령제는 매년 한다. 여건이 되는 마을은 ‘따이한제사’라고 합동제사를 치른다. 베트남 제사는 온 마을사람들이 음복을 하는 풍습 탓에 비용이 많이 들어 매년 하기가 어렵다. 제사를 못지낸 해는 태풍도 오고, 홍수도 나고 마을에 계속 안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다. 제사를 돕기 위해 ‘돼지 한마리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태는 비용은 제사비용의 일부 밖에 안되지만 ‘돼지값’을 보내고 나서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하더라.” 

 

- 지난해 학살 50주기 위령제에는 한국인들도 참가했던데 어떤 표정들인가.   

“엄청나게 운다. 미리 강의도 듣고 참고자료도 봐서 많이 알고 있는데도 어디서 저렇게 많은 눈물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니 느낌이 다른 것 같다. 베트남 주민들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었냐’고 성토하는게 아니라 따뜻하게 맞아주니 더 북받치고 미안해 하는 것 같다. 그들이 원하는게 ‘이 이야기를 한국에 가서 전해줘’, ‘한국정부가 인정해 줬으면 좋겠어’하는 수준이니 더 죄스럽고 안쓰러워하는 것 같다.”

 

- 위령제는 어떤 순서로 치러지나. 

“인민위원회 등 고위인사들이 연설을 하는데 학살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구체적이어서 베트남어를 알면 자리에 있기가 힘들 정도다. 언제 한국군이 들어와 어떻게 죽이고 강간했고, 얼마나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는지를 낱낱이 묘사한 뒤 어떻게 이 상처와 아픔을 극복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지 하는 내용이 뒤따른다. 생존자와 청년대표 연설도 빠지지 않는다. 전야제로 공연도 하는데 한국군 학살을 소재로 만든 <빈안의 한> 같은 노래들이 공연된다.” 

 

2006년 빈딘성 빈안의 위령제에서 구수정이 겪은 일화다. “주민들이 100명쯤 모일 줄 알았는데 수천명이 모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위령제를 지냈을텐데 이 목소리가 한국에 닿지 않았구나’ 싶더라. 사람이 많으니 웅성대기도 하고 조무래기들이 떠들기도 하다가 생존자 연설이 시작되니 일시에 고요해지더라. 참상을 회상하는 연설이 끝나자 참가자들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한국군 규탄 구호를 외치더라. 진료사업을 하던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회원 60명가량이 현장에 있었는데 군중들이 그쪽으로 다가가는 걸 보고 아찔했다. ‘사고다’ 싶었는데 웬걸? 주민들이 한국인들을 안아주더라. ‘이야기 듣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 이건 형식이야. 우린 해마다 해온 거야. 괜찮아’ 이러는 거다.”

 

■‘학살 시민법정’ 내년쯤 개최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되던 것은 1965년 10~11월, 학살은 이듬해인 1966년 초부터 시작됐다. 한국군이 부대터를 잡고 부근 마을주민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노인, 엄마, 아이 가릴 것 없이 도륙했다. 한국군이 가는 곳곳에서 강간, 영아살해, 시신훼손, 방화와 암매장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후 30년간 한국 사회에선 봉인된 학살의 기억을 다시 불러낸 ‘영매’가 구수정이다. 

“1999년에 처음으로 카인호아, 푸옌, 빈딘, 꽝아이, 꽝남성 등 피해 마을들을 45일간 조사하러 다녔다. 마을마다 수백명이 몰려와‘카이, 카이(진술)!’ 하며 손을 든다. 학살 이후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니 오죽 하고픈 말이 많았을까. 하루에 3개 마을씩 돌며 이야기를 ‘받아내다’ 보니 아파서 더 이상 못 듣겠더라. 그러다 ‘베트남 국민시인’인 탄타오를 만났는데 ‘양국 간에 증오가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당신과 나의 몫이다’라고 하더라. 그가 만약 ‘당신의 몫’이라고만 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다.”

 

- 그 사람들은 왜 그럴 수 있는 건가.  

“1945년에 해방됐다가 곧바로 30년 전쟁이 벌어졌고, 중월전쟁, 캄보디아 전쟁이 이어졌다. 전쟁이 가까운 현실이니 빨리 잊어야 살아갈 수 있었던 거다. 조사하러 가서 ‘당신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얼마나 아프셨어요?’ 하면 상냥하게 대해준다. 고구마, 과일을 갖고 와 먹여주기도 한다. 받아 먹으면 바로 물을 떠와 입 헹구라 손씻으라 한다. ‘피해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 한국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다고 보나. 

“미군이 1968년에 109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밀라이학살’의 경우 현장사진들이 공개됐는데도 당시 미국 내 여론조사에선 ‘못 믿겠다’는 응답이 대다수였다. 반면 내가 첫 르포를 썼을 때는 사진도 없었고, 오로지 피해자들 증언이었는데도 사람들이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더라. 제주 4·3,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1980년 광주학살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도 이렇게 죽였는데 밖에선 오죽했을까’ 싶은 거다. 첫 보도가 나가고 며칠간 격려메일이 하루 1000통씩 쏟아졌다.” 

 

- 당시엔 ‘베트콩은 죽여도 된다’는 게 통념이다시피 했으니. 

“제주 4.3대책위 관계자들이 ‘우리는 40년간 입도 뻥끗 못했다. 베트남은 그래도 보도도 되고 사람들이 잘 받아들여서 우리보다 낫다’고 하더라. 참전군인들이 2000년에 한겨레에 난입하는 폭력사태가 빚어지긴 했지만 반발은 참전군인들에 국한됐다. 처음 르뽀기사가 나간 뒤 며칠간 하루 1000통꼴로 메일을 받았다. 많은 분들이 ‘베트남에 사과하고 싶다’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 참전군인들로부터 피소당했는데 어떻게 됐나. 

“최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구성된 변호인단이 법적인 해결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적어도 퐁니·퐁넛 학살은 승산이 있어 보인다. 학살 사건들 중 베트남 측 자료만 있거나 가해자 증언이 없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퐁니·퐁넛은 베트남 측 자료, 베트남 피해자 증언에 미군이 찍은 사진과 자료, 가해자인 한국군의 증언까지 있다. 우선 2000년 열린 ‘도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과 유사한 시민법정을 2018년 봄에 개최한 뒤 국가배상소송에 나설 거다. 승소하면 정부는 무조건 배상해야 한다. ‘베트남학살배상특별법’도 검토 중이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은 2015년 말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졸속 타결되면서 다시 힘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일본처럼 하면 안된다, 정의롭게 풀고 가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 정부는 여전히 공식입장이 없는 건가. 

“공식적인 입장을 안내고 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고도 안하고, 그렇다고 인정도 하지 않고 있다. 입장내기가 힘들거다. 재단이 만들어졌으니 정부와도 채널을 갖고 협의할 생각이다.”


지난해 경남지역 중학생들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관한 수업을 들은 뒤 미안함을 담아 만든 것이다. 한베평화재단은 이 엽서 내용을 베트남 현지에 전했다. @강윤중 기자

 

■과거사의 ‘뚜껑’ 언제든 열릴 수 있다 

베트남 학살 문제를 외면한 채 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기대하는 건 모순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1년 한·베 정상회담에서 에둘러 사과했을 뿐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사과·배상은 없었다. 베트남 학살 50주기인 지난해 현지 곳곳에서 위령제가 크게 열렸고 국영 VTV가 다큐멘터리 <마지막 자장가>와 <미안해요 베트남>을 지난해와 올해 3월 방영했다. 지난 2월 빈안학살 51주기 위령제에서 생존자 응우옌떤런은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 물질적·정신적 배상’을 요구했다. 


- 다큐멘터리는 어떤 내용들인가. 

“<마지막 자장가>는 1966년 빈호아 마을 학살의 생존자 도안응이아와 동갑내기인 나의 엇갈린 운명을 그렸다. 도안응이아는 김서경·김운성 부부가 만든 ‘베트남 피에타상’의 모티브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학살로 온 가족을 잃었다. 엄마가 갓난아기인 그를 끌어안은 채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 위로 시신들이 겹쳐지는 바람에 살아났지만 눈에 핏물과 탄약가루가 들어가 실명했다. 총에 맞아 엉덩이가 날아가고, 온몸이 총상과 파편투성이였지만 기적적으로 치유됐다. 10살에 처음 걷기 시작했는데 그날 마을 잔치가 열렸다. 66년 동갑내기 중 한쪽(구수정)은 사과하고 다른쪽(도안응이아)은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큐로 만든거다. <미안해요 베트남>은 학살을 다루되 한국 시민들의 사죄운동을 바닥에 깔고 있다. 운동이 베트남에서 반한감정이 불거지지 않는 역할을 한 거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총을 맞고 먼저 기절해 쓰러지면 그 위로 시신들이 덮친 채로 있다가 나중에 발견되는 경우다. 시신들 밑에 깔려 있다 보면 눈과 코, 입으로 피가 계속 흘러 들어간다고 한다. 숨을 쉬어야 하니 그 과정에서 핏물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보면 ‘피비린내가 나 죽겠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다 헛구역질을 하거나 줄곧 담배를 피운다.” 

 

- 베트남 정부는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한다’는 기조였던 걸로 알려져 있었는데, 입장이 바뀌고 있는건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는 베트남의 슬로건은 번역과정에서 오해가 좀 생겼다. ‘과거를 닫는다’는 베트남어로 ‘켑 라이 꾸아크’인데 ‘켑(khep)’은 시골에서 잠시 옆집 마실 갈 때 사립문을 슬쩍 걸쳐둔다는 뜻이다. 완전히 닫힌게 아니라 언제든 열릴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켑 라이 꾸아크’는 주로 내부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100년 지배를 받은 뒤 곧바로 30년 전쟁을 치렀으니 최우선 과제는 통합이었다.” 

 

- 한베평화재단의 출범도 이런 흐름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재단을 만들 생각을 한 건 저들이 과거사 문제를 제기할 때 한국에서 받아줄 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는 한국군학살피해대책위가 필요하다는 의견들도 나온다. 언제든 뚜껑이 열릴 수 있는 문제인 것 같다. 그간엔 먹고 사는 문제로 과거 상처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 것도 있다. 하지만 과거는 잊지 않고 있는게 보인다. 99년에 현지조사를 다닐 때 보면 80~90%가 모래무덤, 일부가 흙무덤이었다. 근데 그 뒤로 보니 모래무덤이 흙무덤으로, 다시 석관묘로 바뀌더라. 99년에는 학살장소가 공터였는데, 비석이 세워지고, 제단이 서고 공원이 만들어졌다. 여력이 생기는 대로 묘를 새로 쓰고 위령비를 세우고, 유적지로 조성하는 작업을 해온 거다.”

구수정은 꽝남성의 한 초등학교 5학년 도덕수업 자료를 보여줬다. 학살 현장학습 과제의 질문은 ‘학살이 있던 방공호는 몇 곳인가’ ‘학살 피해자 중 0~6세, 60세 이상은 각각 몇 명인가’ 같은 것들이다. “중·고교 역사시간에서도 학살을 배운다. 마을 초입에는 증오비가 서 있다. 잊을 수도, 모를 수도 없다.”

 

- 우리는 민주화 이후에야 과거사의 봉인이 풀렸는데 베트남은 좀 다른 것 같다.   

“전혀 다르다. 위령제를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제주 4·3 피해자는 숨죽이고 살았지만 이분들은 그런 세월은 없었다. ‘하미 비문 사건’ 같은 일도 있긴 하지만.”

1968년 135명이 학살당한 하미 마을에 한국 참전단체가 돈을 대 2001년 위령비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학살 정황이 묘사된 비문을 한국 정부가 문제 삼아 결국 비문을 봉인한 것이 ‘하미 비문 사건’이다. 비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1968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 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참전전우복지회가 ‘베트남에 화해의 비를 세우러 간다’고 했다더라. 어떻게 가해자가 먼저 화해란 말을 꺼낼 수 있나. 또 한국군에 희생된 피해자들이 가해군인들과 합동으로 추모받고 싶을 거 같은가. 그래도 건축기금이 마을에 전달되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막지 않았다. 근데 그때 막았어야 했다. 비문이 문제가 돼 준공식이 지연되고 한국 정부가 압력을 가하자 베트남 정부가 비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지금도 주민회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첫 회의 때는 참석자들이 아무말 없이 통곡만 하더라. 한 주민이 ‘너희들이 몰려와 우리 다 죽인게 1차 학살, 불도저로 시신 밀어버린게 2차 학살인데 비문까지 없애라고 하는 건 우리 정신까지 말살하는 3차 학살 아니냐’고 하더라. 결국엔 유족들이 나더러 증인이 돼달라고 하더니 ‘우리는 이 비문의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둘거고, 잠시 대리석 한 장을 얹을거다. 나중에 대리석을 여는 일은 한국친구들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비문은 17년째 닫힌 채로 있다. 학살이 과거사가 아니라 ‘오래된 현재’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우리만 몰랐거나 모른척 했던 학살 

- 미국은 밀라이학살이 벌어지자 해당 군인들을 처벌했다. 

“밀라이 학살이 반전의 기폭제가 되고 세계적으로 사진이 공개돼 즉각 진상조사를 안할 수 없는 처지였다. 진상조사단이 파견되고 책임자가 사법처리됐다. 미국의 베트남 참전 군인단체들은 대체로 진보적이다. 이들과 많은 시민단체들이 밀라이에 대해 대대적인 보상과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전쟁 때 융단폭격을 하더니 지원도 융단폭격하듯 한다’고 주민들이 이야기할 정도다. 밀라이 바로 옆 빈호아는 한국군에 당한 곳이다. 빈호아 주민들은 ‘학살이 숙명이었다면 차라리 미군한테 당할 걸’ 하고 한탄한다.”

 

- 일본에서는 한국군의 학살 규모를 1만~3만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내가 9000명으로 추정했다고 언론들이 쓰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2000년 제주 인권학술대회에서 학살 통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미국 퀘이커교도의 조사, 베트남 정부가 수집한 자료. 내가 다니면서 확인한 자료를 종합했다는 단서를 달아 80건 9000명이라는 숫자를 제시한 적이 있다. 나중에 가니 단서는 사라지고 숫자만 남았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학살이 숱하다. 학살이 이뤄진 5개성 중 우선 꽝남성에 대해 학살목록을 만들고 있는데 이미 2000년 발표된 것의 2배가 넘는다. 베트남 정부 기록외에 베트남 공산당이 당사 발간을 위해 역사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학살들을 밝혀내고 있다. 그 자료를 단서로 마을에 들어가면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학살들이 또 나온다. 고구마들이 줄거리 따라 줄줄이 나오듯 한다. 그래서 감히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다.”

 

- 국제사회에서는 일찌감치 학살이 알려져 있었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거나 모른 척 해온 것인가. 

“68년 1월 한국군 해병 2여단이 145명을 학살한 꽝남성 투이보 마을에는 ‘준코’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다. 일본 대학생 다카하시 준코가 1993년에 일본의 시민단체 ‘피스보트’의 일원으로 베트남 투이보 마을을 방문한다. 학교 건물이 없어 학교도 못가고 맨발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 귀국한 뒤 몇년간 거리모금을 벌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다. 준코의 부모가 생전에 못다 이룬 딸의 꿈을 대신해 학교를 건립한다. 청룡부대가 430명을 학살한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에도 피스보트가 일본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을 끌어와 초등학교를 지었다. 이 마을에는 이미 80년대에 영국인 작가가 들어와 한국군의 학살을 조사해 422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명단작업이 쉽지 않은 일인데 전쟁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 외국인이 어떻게 일일이 조사했는지 감탄스럽다. 빈호아 마을은 약이라곤 ‘빨간약(머큐로크롬)’ 뿐인 대단히 낙후된 곳이지만 주민들이 의족과 의수를 하고 다니더라. 80년대 독일 NGO들이 와서 만들어준 거다. 영국인 작가가 조사해 발표하면서 마을이 알려졌고, 그래서 들어왔을 거다. 이미 전쟁이 한창이던 67년부터 미국 퀘이커 교도들이 한국군 학살 실태를 조사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선 99년 훨씬 이전부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알려져 있던 거다.”

 

- 빈안에서 1004명이 학살됐는데 공습이나 폭격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 기록을 보면 너무도 잔인했다는 생각이 든다. 

“베트콩으로부터 먼저 공격을 당한 뒤 보복차원의 학살이 많았을 것으로 한국에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것도 있다. 그런데 실제 조사를 해보면 ‘보복형 학살’이 아닌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학살의 60% 정도가 66년, 즉 한국 전투부대가 파병된 이듬해 벌어진다. 마을에 들어가 부대터를 잡기 위해 주민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학살이 많이 벌어진다.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보복을 하는 게 아니라 오자마자 마을에 남은 사람들을 다 죽인거다.”  

 

- 왜 이리 잔인했던 걸까. 

“주민들이 사람으로 안보인 거다. 빨갱이라고 생각하고 죄의식없이 죽였던 것 같다. 제주 4·3, 한국전쟁 과정에서 자국민도 예사롭게 죽였는데 타국민 타인종, 더구나 빨갱이를 학살하는 것은 쉬운 일이거든. 우리안에 내면화된 폭력의 기제가 타국민을 향해 너무 쉽게 발현된 거다. 베트남 사람들은 ‘말만 통했어도’라는 말을 많이 한다. ‘우리아이만 살리고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죽였다고 한다. 말만 통했어도 이렇게 학살이 이토록 광범위하진 않았을 거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통역은 없었나) 거의 없었다. 작전중에 통역병을 계속 데리고 다니거나 하는 건 드물었다.” 

 

- 미군은 밀라이 학살외에 큰 학살이 없었나. 

“많지 않다. 그런데 미군에 의한 학살이 많지 않았던 것은 ‘역할분담’ 때문인 것 같다. 보통 미군은 후방에서 포를 쏘고, 한국군은 마을에 투입되는 식이다. 어렵고 힘든 임무를 한국군이 도맡은 거다. 또 미군은 서부 고원지대, 한국군은 해안에 주로 배치돼 베트콩과 접촉면이 넓었다.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미군은 마을에 오면 베트콩인지 아닌지를 심문했고. 한국군에 의한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수송해주고 했다고 한다. 한국군 학살이 있던 마을에서는 미군이 신사적이었다고 증언한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강윤중 기자


■베트남전, 전쟁과 폭력을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야 

지난 19년의 소감을 묻자 구수정은 “사고치는 건 한순간인데 그걸 감당하는 세월은 길더라”며 웃었다. “베트남 유학 1세대였고, 진출한 기업들과 일하며 돈도 잘 벌었지만 학살 문제를 제기한 이후 한동안 전기·수도가 끊길 정도로 어려웠다.”

 

- 참전군인들도 어떤 의미에선 피해자인 셈이다.  

“일본의 평화운동가 오다 마코토(小田實)선생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게 아니라,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참전군인들은 분명 국가권력의 피해자다. 그래서 학살의 문제는 참전군인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전쟁이라는 매커니즘 속에서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행복한 여생을 보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도 학살 문제를 인정하는게 마음이 편해질 것이지만 고백했다가 번복하는 분들도 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이 얕다보니 그렇게 된다. 당시 전세계가 반전운동으로 시끄러웠지만 한국은 무풍지대였다. 국회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파병안이 쉽게 통과됐다. 그때부터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것이고, 이분들은 그렇게 파병돼 지금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거다.”

 

- ‘월남특수’가 경제도약의 발판이었다는 식으로 참전을 미화하기 때문일까.  

“베트남전쟁이 한국에 ‘신의 선물’이었다고 누군가 이야기했지만 과연 신의 선물이었을까. 최대수혜국은 단한명도 파병하지 않은 일본이었고, 단 25명을 파병한 대만의 월남특수도 우리와 별 차이없다는 분석도 있다. 우리가 전투병을 대규모로 파병하지 않았다면 특수가 없었을까. 그런 질문이 필요하다.”

 

- 과대평가됐다는 뜻인가. 

“한일협정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져 개발자금을 받았다. 파병만이 마중물은 아니었다. 파병을 통한 이득시 실질적인 국익이었는지 아니면 박정희 정권의 주머니만 채웠는지 따져볼 문제들이 많다.”

 

- 학살당한 이들이 베트콩이었다는 반론들도 있다. 

“베트남에서는 베트콩과 유격대는 물론이고 연락원, 간호사, 마을 부녀회장을 하다 숨진 이들도 ‘열사’로 돼 있다. 열사가 되면 일시 지원금도 많이 받고, 유족이 수당도 받는다. ‘집안에 열사 1명 있으면 가난을 면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국에서 학살 피해자들이 베트콩이었다는 논란도 있지만 현지에 가보면 확실하게 구분돼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너무 많이 학살당했다. 빈안의 고자이마을에서는 380명이 1시간 반만에 몰살당했는데 위령비를 보면 ‘보자인’(무명)이란 표기가 50명이 넘는다. 태어난지 얼마 안돼 이름도 채 못 지은 아기들이다. 하미에서도 135명 중 절반이 어린아이다. 갓난아기가 베트콩인가. 설사 베트콩이라도 이렇게 막 죽여도 되나.”

 

- 다음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한국사회 내에서는 아직도 ‘의혹’이란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우선 정부차원의 진상규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식 인정·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계속 외면한다면? 

“언젠가는 뚜껑이 열릴 문제다. 피해자들이 있고, 기억할 뿐 아니라 해마다 애도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한국-베트남을 넘어선다. 반인륜·반인도적인 전쟁범죄여서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얼마든 다뤄질 수 있다. 조금이나마 다행인 것은 베트남이 제기하기 전에 한국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제기하고 먼저 사과하고 있는 거다.”

 

- 대선후보들은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  

“표를 의식해 못할 것 같다. 사실은 시민들보다 정책 결정자들의 인식이 더 저열하다. 당시 지식인들조차 베트남전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하는 이는 드물었다. 당시 파병을 반대하던 민중당 당수 박순천씨가 66년 베트남을 방문했는데 비행기 위에서 풍요의 대지를 내려다본 뒤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베트남 땅에 입을 맞춘다. 동아일보에 방문기를 썼는데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고 민족의 위력을 발휘한 이 감격, 이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 우리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야당 총재까지 오른 이가 ‘식민의 야욕’을 드러낸 거다. 이게 한국 지식인들의 인식수준이었다. 당시 전 세계가 반전운동으로 시끄러웠고 일본에서는 260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할 정도였지만 한국은 반전운동의 무풍지대였다. 그나마 학살이니 이 정도라도 성찰이 되고 있는 거다. 베트남전쟁과 참전 자체에 대한 성찰은 아직도 불가능한 것 아닌가.” 


구수정은 재단이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전쟁을 우리 사회가 전쟁과 폭력에 대한 성찰을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분단이 우리를 할퀴었던 그래서 내면에 곪아있지만 감히 끄집어내기 어려웠던 것들을 성찰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고,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 평화로 향하는 출발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