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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동포 장률감독의 문제작 <두만강>

서의동 2017. 5. 2. 16:41

조선족 마을에 사는 소년 창호(가운데)가 배가 고파 강을 건넌 소년 정진(왼쪽)을 집에 데려와 함께 밥을 먹고 있다. 출처 = 다음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영화 <두만강>(2009년)을 봤다. 굉장히 여러가지를 동시에 생각하게 하는 인상깊은 작품이다. (페북에 썼지만 블로그에 기록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포스팅한다) 

영화는 두만강이 지척인 중국의 한 조선족 마을에 탈북자들이 드나들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소재로 했다. '사건'에는 긍정적 부정적 의미가 다 포함된다. 배가 고파 넘어온 북한 소년들과 조선족 소년들이 함께 어울려 축구를 하면서 우정이 싹트는가 하면 밤에 배가 고프다고 불쑥 찾아온 탈북자에게 밥과 술을 주는 친절을 베푼 소녀가 성폭행을 당한다.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널어놓은 명태와 염소가 도난당하는 일도 발생한다. 

이 외딴 조선족 마을 주민들에게 북한과 남한의 이미지는 굉장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곳은 접경지역이라 TV를 켜면 북한방송을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술을 한잔하면 북한 노래를 즐겨 부를 정도로 북한에 친숙하다. 술자리에서 한 노인이 <두만강>을 부르자 동석한 이가 "재미없다"며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치매에 걸린 한 노파는 북한이 여전히 잘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생활고가 심했을 때 많은 이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다.) 이 노인은 수십년전에 강을 건너 중국에 정착했고 고향을 여전히 그리워 한 나머지 북한쪽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이곳 주민들에게 북한인들은 '강건너 사람'들로 통한다. 강을 건너 오가는것을 그리 대단한 일로 여기지도 않는다.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이 사는 이웃마을일 뿐이다. 북한주민들과는 직접적인 접촉이 이뤄진다. 마을에서 신망받는 중년 남성은 탈북자들을 몰래 중국으로 도피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조금 더 자연스러웠을 이 '왕래'는 공권력에 의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또다시 강을 건너온 정진(오른쪽)과 창호가 마을 아이들의 아지트인 폐 건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다음

주인공인 소년 창호의 엄마는 한국에 돈벌러 갔고 전화를 통해서만 소통한다. 한국서 일하러 가 허리를 다친 엄마를 위해 창호와 할아버지는 시내에 나가 약을 사서 우편으로 부친다. 우체국서 일하는 여성은 "한국 약값이 비싸다"면서 "나도 한국에 일하러 갔다가 다쳐서 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은 돈을 벌게 해주는 기회의 땅이면서도 사람을 병들게 하는 위험한 곳으로 그려진다. 돈 벌러 가는 이들이 많아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가 없이 할아버지나 큰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가족해체의 원인을 한국이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창호의 누나가 탈북자에게 성폭행을 당해야 했던 원인도 거슬러 올라가면 가족해체 탓이기도 하다. 이 마을 주민들이 남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연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이 주민들의 시선에는 접경지역 마을에서 자라났던 감독 장률의 생각이 담겨있는 듯하다. 장 감독이 연출한 영화 <경주>를 보면 베이징대 정치학과 교수 최현(박해일 분)이 한 술자리에서 우연히 지방대 교수와 마주하게 된 장면이 떠오른다. 이 지방대 교수는 최현이 유명한 국제정치학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김정은의 북한이 얼마나 갈 거 같냐"고 묻는다. 최현은 잠시 대답을 보류하다 "100년"이라고 답한다. 지방대 교수가 "날 무시하는 거냐"고 재차 묻자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100년"이라고 답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북한에 대한 표준적인 인식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극의 흐름과는 무관한 이 에피소드를 장률이 집어넣은 걸 보면 "한국이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등장배우들중에서는 조선족 출신 록가수 최건외에는 모두 아마추어들이고 클로즈업 촬영도 등장하지 않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함경도 사투리가 알아듣기 어려워 모든 대사가 자막처리됐다. 

이 영화를 보면 뉴스에서나 접해온 중국과 북한 접경지대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강이 어는 겨울에는 10대 소년들이 한달음에 건널 수 있는 거리다. 


<두만강>은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수상했고, 러시아에서는 제3회 이스트웨스트 국제영화제(2010년)에서 감독상과 최우수 여자 연기자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국내 관객수는 3000명에도 못미쳤다. 일부 대자본이 미는 한국영화들이 스크린을 독점하는 탓에 문화다양성이 말살되고 있는 한국 극장가의 현실이 참으로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