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집에서 IPTV로 러시아 영화 <세바스토폴 상륙작전>을 봤다. 지난번에 본 <레닌그라드: 900일간의 전투>영화가 인상적이어서 러시아 영화에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 영화 역시 그랬다. (헐리우드 영화 문법으로 본다면 어딘가 어색하고 허술해 보이기도 할 것 같다.) 스토리는 실화에 기반한 것인데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적이다.
주인공은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키에프대학의 역사학도인 파블리첸코는 대학합격을 확인한 뒤 친구들과 사격장으로 놀러간다. 사격장에서 천부적인 사격실력을 발휘했고, 이 사실이 군부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군부는 파블리첸코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6개월 코스의 스나이퍼 훈련을 시킨다.
이어 독소전에 참가한 파블리첸코는 우크리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와 크림반도의 항구도시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309명의 독일군을 저격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며 전쟁영웅이 된다. 참고로 오데사는 소련 영화 거장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반란이 일어났던 도시로 '오데사의 계단'신이 후대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정부군의 반란진압으로 시민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거나 도주하는 와중에 계단에서 유모차가 구르는 장면을 교차편집한 '오데사의 계단' 신은 몽타쥬 기법의 대표적인 사례다.
바블리첸코는 이후 미국 캐나다 영국 등을 방문하게 되는데 서구 매스컴은 그에게 '죽음의 숙녀'라는 별로 기분좋지 않은 별명을 붙여 준다. 파블리첸코는 1942년에 국제 학생대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과 친분을 맺게 된다. 루스벨트 부인의 배려로 백악관에 머물면서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잊고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국 포스터엔 '초대형 블록버스터'라고 쓰여있긴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같은 대규모 물량공세는 없다. 전투신도 어찌보면 허술해 보이지만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총을 맞은 병사의 복부에서 시뻘겋게 내장이 튀어나와 있다든지, 언덕에 설치된 포대가 무너져 내리면서 참호를 덮친다든지 하는데 전장에서는 총이나 포탄 외에도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많음을 일깨워준다) 파블리첸코는 입대후 두명의 상관과 사랑을 나누지만 모두 전장의 이슬이 되고 만다. 입대전부터 그를 좋아했던 군의관도 그를 살리고 희생된다.
영화는 전쟁이 갖는 본질적인 비극성을 한 여성전사를 통해 드러낸다. 스나이퍼 훈련을 받을 때 물이 흥건한 진흙탕에서 낮은 포복으로 박박 기는 장면은 나 군대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고, 소련군 장교의 당꼬바지는 한국전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여주인공인 율리아 페레실트의 눈매다. 백발백중 스나이퍼로서의 매서운 눈이기도 하지만, 연인들을 잇따라 떠나보내는 비련의 슬픔을 담은 눈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주인공으로 율리아 페레실트를 캐스팅한 것은 훌륭한 선택인 것 같다.
고작 두편으로 평가하는 건 얼토당토하지 않지만 러시아 영화는 일부러 감정선을 자극하지 않는 절제된 연출이 특징인 듯하다. 서정보다 서사가 많다고 할까? 워낙 크고 우여곡절이 많은 나라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세바스토폴은 흑해 크림반도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다. 2차 대전때 독일과 소련간에 10개월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소련군 9만5000명이 숨지고, 독일쪽도 2만5000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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