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나의 1987년

서의동 2018. 1. 8. 14:15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 


1987년 1월3일. 겨울방학을 맞아 대전 부사동에 있는 집(단독주택)에서 홀로 빈둥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늦은 오후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낯선 사내 두명이 대문 앞에서 "서의동 학생 집이냐"고 물었다. 문을 열어주자 점퍼차림에 눈빛이 날카로운 사내들이 다짜고짜 집안으로 들어왔다. 관악경찰서 대공3계의 형사들이었다.(한명은 40대 정도였고, 한명은 전경에서 경찰로 특채된지 몇년 안된 젊은 형사였다)


형사들은 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뒤 수배됐던 고교동창 A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 이 녀석이 대학입학 때 제출한 학생생활 카드에 가까운 친구로 내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녀석이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한 건 86년 2학기였고, 출마하기 직전에 우리 하숙집으로 찾아온 뒤로는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녀석의 행적을 묻던 형사들은 내가 모른다고 하자 내 방으로 올라가 책장을 뒤졌다. 별게 없었는데 용케 민중신학 계통의 책을 한 권 찾아내더니 "사상이 불온하다"고 윽박질렀다.


그때 적당히 거짓말을 해서 둘러대면 이 형사들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정말 황당무계하고 바보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2학년 겨울방학 때 '공활(공장활동)'을 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부천시의 한 자취방 주소를 일러줬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일이 더 커졌다. 형사들이 경찰서로 가야겠다며 끌고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이 상황을 보고 기겁을 했다. 어머니는 "애
혼자는 죽어도 못보내니 같이 가겠다"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형사들은 귀찮은 기색을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함께 용전동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당시엔 신정연휴가 사흘이어서 이날이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출근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려는 사람들로 터미널은 붐볐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형사들은 나를 데려가려고 서울가는 고속버스 표 3장을 미리 끊어놓은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타려던 차의 맨 뒷자리가 딱 1석이 비어 있어 운좋게 어머니도 같은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만약 만석이었다면 형사들은 어머니를 따돌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내 운명이 어찌 바뀌었을지 모른다.


관악경찰서에서의 하룻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시간대에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사당동에 있던 관악경찰서에 도착했다. 
경찰서 2층 복도 벽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 그림 뒤에 대공3계의 출입문이 숨겨져 있었다. (밖에선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 형사들은 어머니를 떼어놓더니 나를 데리고 대공3계 사무실에 들어갔다. 책상와 의자 몇개가 있는 평범한 사무실인데 책상위에 노란색 파일들이 눈에 띠었다. 자세히 보니 수배대상 학생들에 관한 기록철들이었다. 이름들을 보자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 곳에서 다시 심문이 시작됐다. 대공3계장 오모 경감(이름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지만)도 남아 있었다. 오계장은 50대로 퇴직이 몇년 안남은 듯 했다. "부천시 약대동은 사실 내가 예전에 공활할 때 자취하던 장소"라고 사실대로 불었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85년도 사진


하지만 심문은 오래가지 않았고, 두들겨 맞지도 않았다. 형사들은 어머니가 뒤따라 올라온게 무척 신경쓰이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나를 끌고간 형사 2인조 중 한명도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좀 심문이 느슨했던 건지 모르겠다. 결국 다음날 새벽에 풀려났다. 오경감이 밖에서 몇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에게 "이웃들 눈이 있으니 새벽기도 다녀오는 것처럼 일단 들어가시라"고 했다. 

빨리 풀려난 이유에 또다른 배경이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서울시경의 경무관급 간부에게 청탁을 한 것이다. 시경이 당시 남대문로에 있던 시절이다.


형사들은 풀어주는 대가로 조건을 제시했다. 방학기간 중 대전에 내려가 있지 말고, 서울에 올라와 있으라. 그리고 녀석의 소재를 알 수 있도록 협조하라. 한마디로 끄나풀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두웠던 1986년 


당시 상황을 좀 정리해보면 이렇다. 84학번인 난 3학년을 마친 상태(정확히는 2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해서 5학기를 마침)였다. 학생운동 써클에 적을 두곤 있었지만 천성이 날라리여서 운동권의 주변부를 맴도는 정도였다. (주말이나 방학 땐 툭하면 대전에 내려가 미팅하거나, 친구들과 고고장을 전전하던 '박쥐'였다)


1편에서 '공활'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2학년 겨울방학 때 소규모 공장지대였던
부천시 약대동에 방을 얻어놓고 친구 3명이서 공장에 잠깐 다닌 적이 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사례가 많았는데, 재학중 '맛뵈기'를 하는게 공활이다. 나는 프레스공장에 며칠 다니면서 '역시 내 갈 길이 아니다'라는 걸 절감했다.


사건이 나기 한해 전인 1986년은 대학가에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노선이 대중노선을 내세우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정치권에선 신민당의 개헌추진 운동이 힘을 받고 있었다. 개헌을 고리로 학생운동과 정치권이 결합할 가능성이 커졌다.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을 궤멸하기 위해 발악했고 1986년 가을 건대사태를 기획했다. 1300명 가까운 학생들이 구속되면서 운동권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후로도 검거선풍이 일었다.


86년 가을 이후에는 운동권들이 학교에 남아있는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간혹 학교에서 아는 얼굴들과 마주치면 서로 어색해 하곤 했다. 남은 이들은 좌절속에 빠져들었고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번져갔다.

1986년 하숙집에서 찍은 사진.


건대사태에서 기세를 올린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특진 포상을 내걸며 수배자 검거를 독려했다. 그 수배대상에 A가 포함돼 있었고 녀석과는 아무런 조직적인 관련이 없던 내가 애꿎게 걸려든 것이다. 단지 학생생활카드의 '친구'란에 이름이 오른 죄로....


열흘만에 끝난 소동 


소동은 10여일만에 끝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박종철 사건도 수배자 박종운을 잡기 위해 벌어졌다는 점에서 흡사했다. 그쪽은 좀더 거물이어서 일선 경찰서가 아닌 치안본부가 나섰던 것이었을 뿐. 아무튼 대형사고가 터지면서 경찰의 검거선풍에 제동이 걸렸다.


박종철 사건이 발생한 뒤 서울대에서 규탄집회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나타나 집회를 주도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 뒤 연락이 와서 오모 계장과 만났는데 대뜸 "왜 그 녀석이 집회에 나온 거 연락을 안했느냐"고 질책했다. 그 녀석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 있긴 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는 속수무책 상태였다. '나더러 어쩌라는거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찍히지 말아야 했기에 고개만 숙이고 있던 기억이 난다.


며칠 더 있다가 다시 낙향했다. 경찰이 더 이상 찾지는 않았지만 언제 다시 들이닥칠까 조바심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안되겠다 싶어서 빨리 군대를 가려고 공군시험을 쳤는데 떨어지고 말았다.


87년 4월쯤으로 기억되는데 형사들이 다시 한번 연락해왔다. 그들의 요구로 내가 공활하던 자취방이 있던 부천시 약대동에 동행한 적이 있다. 사건 종결을 위해 필요한 절차였던 게 아닌가 싶었다.


소동은 이렇게 마무리됐고 나는 87년 7월에 입대했다. 그 녀석은 3년 가량 도망다니다 89년에 복학했고, 무사히 졸업해 변호사가 돼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 "예수님 때문에 너 살아난 줄 알아라. 그 형사가 기독교 신자여서 그래도 우릴 봐준 거다"며 교회 다니라고 들들 볶는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대전 집 안방에 예수 초상화가 걸려 있어서 형사들이 마음이 그래도 좀 누그러졌다고 하는데....글쎄? 

90년에 찍은 가족사진


아무튼 확실한 건 어머니 덕을 그때 제대로 보긴 한 것 같다. 지금은 어머니와 웃어가면서 회고할 수 있게 됐지만, 당시엔 살 떨리는 나날이었고, 어두웠던 청춘의 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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