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협상 25년 역사는 동일한 패턴의 지겨운 반복 과정이었다. 협상이 타결되고 관계 개선의 전기가 마련될 때쯤이면 북한에 대한 새로운 의혹이 돌출하거나, 미국이 합의에서 벗어난 요구를 하며 북한을 자극한다. 북한이 반발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북·미관계가 다시 얼어붙는다. 폐곡선(閉曲線)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장난감 기차처럼 북·미관계는 수십년째 같은 경로를 뱅뱅 돌고 있다.
1992년 1월 한·미 양국이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기로 하자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체결은 한반도 국면을 바꿀 만한 중대 결정이었다. 그러자 ‘북한이 핵무기 1~2기를 만들 수 있는 10㎏ 안팎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추정을 미국 CIA가 들고 나왔다. 북한이 IAEA에 신고한 플루토늄 추출량 90g과 차이가 커 북한이 몰래 핵무기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커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미 양국은 팀스피릿 훈련 중단 방침을 번복하면서 정세가 악화됐다. 이 의혹은 2008년 5월 북한이 제출한 원자로 재처리시설 가동일지를 미 국무부가 분석한 결과 북한의 최초 신고가 정확한 것으로 판명나면서 16년 만에 풀렸다.(정욱식 <핵과 인간>)
미국이 경기 도중 골대를 옮기는 일도 벌어진다. 2008년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자 북한은 곧바로 영변 핵시설 불능화에 착수했다. 그런데 얼마 뒤 한·미 양국은 합의에 없는 ‘핵신고 내용 검증’을 요구했고, 6자 회담은 그해 말로 파탄났다. 2002년에도 미국은 북한이 IAEA의 특별사찰을 받지 않으면 ‘제네바 합의’ 사항인 중유제공과 경수로 건설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했다. 하지만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사찰을 받도록 한 합의와 달리 당시 공정은 기초공사만 진행되던 단계였다. 합의에 벗어난 무리한 요구였던 셈이다.
‘북·미관계 정상화’가 합의되더라도 미국이 자진해서 관계 정상화에 나선 적은 없다. 2005년 9·19 공동성명 한 달쯤 뒤 미국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더라도 당분간 북한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할 계획이 없다”고 못박았다.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이 4년 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기 전까지는 관심을 끊다시피 했다. 애써 구운 피자를 맛도 보지 않고 팽개쳐 놓은 것이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채택한 공동성명은 북·미관계가 폐곡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낳았다. 새로운 북·미관계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고, 신뢰구축이 비핵화를 증진한다는 대담한 접근법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몸에 꽉 낀 코르셋 같은 과거 합의문과 달리 굵직한 것만 추려담은 성명에는 비핵화보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앞세웠다. 두 정상은 악수를 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함께 산책하며 신뢰구축이 북·미관계를 풀 열쇠임을 보여줬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 25년간 익히 봐오던 패턴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의 새로운 의혹들이 줄줄이 불거져 나오고, 미국 정부는 제재위반 사례들을 들어 대북압박을 재개했다. 트럼프는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존 볼턴, 니키 헤일리 같은 강경파들의 목청이 커지고 있다. 북한은 회담 전부터 억류 미국인 3명 석방에 이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동창리 서해위성 발사장 해체, 미군 유해송환 등 선물을 줄줄이 내놨지만 미국은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했을 뿐이다. 공동성명의 취지대로라면 새로운 관계수립을 위해 종전선언이 먼저 추진돼야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신고가 먼저’라며 움직이지 않는다. 정상회담으로 북·미관계의 국면이 바뀌긴 했지만 과거 관성의 힘은 여전한, 이 불일치가 장기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의 중간선거(11월) 시즌이 되면 어떤 변수가 돌출할지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말로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를 원한다면 ‘행동 대 행동’ 방식으로 나서야 한다. 종전선언과 핵신고를 동시에 교환하면 된다. 지난 25년간 북한은 압박에는 강경하게 맞서왔지만 상대방이 내미는 손은 뿌리치지 않았다. 이는 협상 당사자인 미국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총력전의 각오로 다시 한번 북·미 중재에 나서야 한다. 정치권도 판문점선언의 국회비준 동의를 서둘러 한반도 평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지와 열망을 국제사회에 발신해야 한다. 북·미관계가 폐곡선에 갇혀 있는 한 분단의 폐곡선도 열릴 수 없다. 북·미관계가 폐곡선을 박차고 뻗어나갈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2018년 8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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