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예멘 난민 사태가 일깨운 것들

서의동 2018. 7. 11. 16:00

예멘 난민 문제는 사실 답이 정해져 있다. 한국은 유엔난민협약 가입국이자 국내법으로 난민법을 제정한 나라이니 그에 걸맞은 조치를 취하면 된다. 난민신청자가 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난민지위를 부여할지를 가리면 그만이다. 정부는 올 들어 예멘에서 난민신청자가 몰리자 무사증 입국대상 국가에서 예멘을 제외했다. 어느 나라든 특정 국가 난민이 몰리면 ‘입국 밸브’를 일시적으로 잠그는 것은 상례다. 하지만 공항이나 항구에 입국한 난민을 내쫓는 협약 가입국은 없다.

 

유독 예멘 난민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공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난민 기사에 붙은 댓글들을 보면 난민 옹호론은 찾기 어렵다. 댓글 시스템 등장 이래 기사와 댓글이 이번처럼 대척점에 서 있는 경우도 유례없는 일이다. 댓글들로만 보면 예전 북한 핵실험 사태 때보다도 ‘국론통일’ 상태다. 한국은 1994년부터 지난 5월 말까지 난민 839명과 인도적 체류허가자 1540명 등 2379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를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제주도라는 작은 공간에 단기간에 수백명의 예멘인들이 들어온 극적인 상황이 발생하자 비로소 이 문제와 마주한 셈이다. 19세기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난 외양선에 놀란 조선 백성들처럼 미증유(未曾有)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낯선 이가 갑자기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면 누구라도 당황스럽고 두려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민해지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심리가 발동한다. SNS를 타고 번지는 ‘가짜뉴스’는 딱 좋은 재료다. 불안감이 실재하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나 역시 ‘한국이 이슬람 반군과 내전을 치르고 있는 필리핀 민다나오섬처럼 될지 모른다’는 따위의 시나리오에 실소했다가 초등학생 딸을 둔 후배가 ‘제주도에 갔다가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다’는 말에 놀라 가족여행을 취소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실감했다.

 

물론 예멘 난민에 관한 해설기사나 난민단체 관계자 인터뷰만 꼼꼼하게 읽어도 ‘난민들 때문에 범죄가 늘어나고,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주장이 근거 없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한국 내 외국인 범죄율이 내국인의 절반도 안되고, 일자리도 한국인들이 꺼리는 3D 업종이 대부분임을 신문기사들은 친절하게 알려준다. 제주에 체류 중인 예멘인 549명 중 젊은 남성이 80%나 되는 것은 반군의 강제징집 타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기사에 다 나온다. 하지만 기사 밑에 붙은 ‘당신 딸이 피해 볼 수도 있다’는 댓글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난민에 대한 저항감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다. 삐뚤어지고 싶은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난민을 옹호하는 천주교 성직자, 난민단체에게 ‘가르치려 들지 말라’ ‘가식 떨지 말라’거나 혹은 ‘PC충(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 아니냐’는 야유를 퍼붓는다. 이라크, 수단, 방글라데시를 다니며 난민의 참상을 전해온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정우성도 이번엔 뭇매를 피하지 못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조리돌림을 당하는 건 오래된 일이지만 이번엔 꽤 심각해 보인다. ‘좋은 줄은 알지만 나도 힘들다, 잘난 체 말라’는 반응은 생떼형 부정이 아니기 때문에 대처하기가 더 까다롭다. 예멘 사람들이 취업 경쟁 상대가 아닌 것쯤은 2030 세대도 모르지 않는다. 이들이 예민해진 건 정부가 예멘 난민을 위해 취업설명회를 열었다는 점일 것이다. 여성안전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무슬림 청년들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설명이 페미니스트들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수많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례나 한반도 평화문제에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으려면 난민에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는 실리론도 먹혀들지 않는다. ‘난민의 인권, 국민의 인권 중에 어느 게 중요하냐’는 흑백논리는 그간 쌓였던 열패감 탓이 클 것 같다. 보수 개신교의 이슬람 혐오논리, 정부의 어설픈 대처가 이런 정서를 증폭시키는 것도 걱정이다.

 

논란이 진정되려면 ‘익숙해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인 이민자들이 애완견까지 잡아먹는 야만인이라는 편견이 호주사회에서 사라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물론 버지니아 공대 한국인 총기난사 사건 때 미국 정부가 ‘한국인 전체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건’이라고 밝힌 것처럼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다.

 

예멘 난민들은 청년 취업난, 위험에 노출된 여성 같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재차 환기시켰다. ‘정치적 올바름’만 있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반지성주의’가 득세할 수 있음도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