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의 여운이 남은 지난 7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통일에 대한 20대 응답자의 찬성의견이 지난해 38.8%에서 73.3%로 배나 올랐다(서울신문 7월18일자). 20대는 지난해 조사에서 찬성보다 반대가 많은 유일한 연령대였고, 80%가량이 2월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결성을 반대했다. 북·미 후속협상이 교착되기 전의 호시절이라 해도 청년들의 남북관계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로까지 호전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까칠하던 청년들의 마음이 움직인 데는 남북관계 발전이 팍팍한 ‘헬조선’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작용했을 것 같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남쪽 땅을 밟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엄지를 세우는 초현실적 광경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이 진짜 리셋(reset)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가슴속에 움텄을 것이다.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대북 제재완화→남북 경제협력 본격화라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질식 상태의 한국 경제와 사회에 바람구멍을 낼 수도 있다는, 그런 희망이다. 한반도 정세가 내 삶과 긍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청년들은 비로소 실감하게 된 것 같다.
북·미 교착이 장기화되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김칫국을 서둘러 들이켠 감이 있지만, 한국의 청년들이 그 정도로 절박한 상태에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공고한 분단체제 속에서 유일한 버팀목이던 경제마저 엔진이 꺼져가면서 청년들은 한국 사회를 확 바꿔버릴 그 무엇을 갈구하고 있다. 그게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니 더 반가운 일이다. 10년 전 일본에서 등장한 ‘일본리셋론’과 정반대다. 1990년대 취업빙하기에 성장한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는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전후(戰後) 평화주의’의 공고함을 증오하며 ‘전쟁이라도 하자’고 소리쳤었다.
북한이 같은 민족이긴 하되 그 이름에 값할 만큼의 끈적함을 청년들은 경험하지 못했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론이 우리에게 들어맞는 것 같진 않지만, 두 세대 넘게 갈라져 온 지금 상태라면 과히 틀린 말도 아니다. 앤더슨은 민족 인식 형성에 인쇄 자본주의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데 우리는 70년간 노동신문을 읽지 않았고, 북도 마찬가지였다. 남북 주민들이 공통으로 읽은 책이 있기나 한가. 말이 통한다는 것 외에 동질성은 딱히 없다. 지속가능한 공통의 이해기반이 없는 한 ‘우리 민족’은 실재(實在)가 아닌 상상의 공동체다.
평창 동계올림픽,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의 공동입장과 공동응원, 남북단일팀의 활약은 가슴을 벅차게 하지만, 그뿐이다. ‘우리 민족’이 내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눈물나는 영화 한 편 본 것과 뭐가 다를까. ‘우리 민족이니까~’식 수사는 86세대 이전의 전유물이다. 청년들의 북한에 대한 관념은 ‘우리 민족’보다는 ‘함께 평화롭게 번영해야 할 이웃’에 더 가까워 보인다. 냉정해 보이지만 그게 더 오래갈 수 있다.
민족에 대한 관념은 묽어지고 있지만 ‘한·미 동맹’ 이데올로기는 갈수록 공고해진다. 차라리 전쟁을 하면 했지 동맹을 깰 수는 없다는 동맹 지상주의가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콕 박혀 있다. 이 극단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가차 없이 조리돌림을 당한다.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가 지난해 “한·미 동맹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은 안된다”고 했다가 보수세력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한·미 동맹은 한국의 안전보장과 전쟁방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동맹이 안보를 위협해도 찍소리 말라? 반대세력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매장시킨 조선 후기 노론의 광기와 뭐가 다른가.
우리는 대북정책의 ‘금지선’을 만들어 스스로를 옭아매 왔다. 박근혜 정부는 대북제재 대상도 아니던 개성공단을 중단시켰다. 동맹 지상주의가 버티고 있는 한 미국의 대북정책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국회가 판문점선언의 비준동의를 해주지 않는데 경의선 철도 시험운행을 막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대통령이 만든 합의를 우리 스스로가 업신여기면서 미국이 존중해주길 바라는 게 잘못 아닌가. 미국이 종전선언을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말을 바꿔도 ‘잘못한 쪽은 늘 북한’이다. 주체사상 뺨칠 ‘동맹 무오류론’이다.
‘우리민족끼리’로 가자는 것도, 민족과 동맹을 5 대 5로 맞추자는 것도 아니다. 국제정치 현실상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동맹이 평화를 해치려 하거나 우리 이익과 정면으로 엇나갈 때 ‘노(No)’라고 할 정도는 돼야 한다. 그게 건강한 동맹이다. 당국자들이 어렵다면 정치권이라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과도한 동맹 지상주의가 모처럼 피어난 청년들의 꿈을 짓밟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2018년 9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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