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적]‘하기비스 휴전’(2019.10.15)

서의동 2019. 11. 3. 22:22

경향신문DB

제19호 태풍 ‘하기비스’가 일본을 강타하면서 사망·실종자만 5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연 강수량의 3분의 1이 이틀 만에 쏟아지는 등 기록적인 폭우로 21개 하천의 제방이 무너지고 142개 하천이 범람하면서 막대한 침수피해도 동반했다. 태풍 피해소식을 알리는 일본 방송화면에는 불어난 강물로 지반이 깎여나가 단독주택이 통째로 무너지는가 하면 골프연습장의 철주가 인근 가옥을 두 동강이 낸 처참한 광경이 비쳤다.

 

일본은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탓에 국토 면적에 비해 자연재해가 많은 편이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이웃나라가 도와주면서 관계개선의 전기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일 간에는 거꾸로 양국감정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흘러갔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2만명이 쓰나미에 휩쓸리는 대재해가 발생했을 때도 국내 일부 신문이 1면 헤드라인을 ‘일본 침몰’로 뽑아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일본에서 초유의 대지진이 발생해 바닷속으로 침몰한다는 가상영화에서 딴 제목이지만 ‘상처에 소금 뿌린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번 하기비스 태풍 피해를 두고 국내 일부 누리꾼이 조롱하는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슬픈 기사인데 왜 웃음이 나냐”라거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태풍이 확 쓸어가버렸으면” 같은 험한 말들이 기사 댓글난을 채우고 있다.

 

넉 달째로 접어든 한·일 갈등은 전쟁에 비유하면 참호를 깊게 파고 진지전을 벌이던 제1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한다. 초기의 격렬한 공방은 사라졌지만, 지루한 소모전이 지속되는 형국이다. 그런데 평소 좋지 않은 사이라도 상대가 힘든 처지에 놓였을 때는 위로하고 돕는 게 인지상정이다. 정부 간에 대립하더라도 일반 시민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인터넷 공간에서라도 양국이 ‘휴전’을 선포하는 것은 어떨까.

 

1914년 12월24일 제1차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은 성탄절을 맞아 짧은 휴전을 가졌다. 참호 속에서 총구를 겨누던 양국군이 ‘너희 쏘지 말라. 우리도 안 쏘겠다’라는 팻말을 앞세우고 서로 다가가 악수를 나눴다. ‘성탄절 휴전’을 이끌어낸 것은 군 지휘부가 아니라 참호 속에서 대치하던 병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