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적] ‘평화어’ 한글(2020.10.27)

서의동 2021. 5. 25. 20:45

출처 : Shushan의 트위터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는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조선 최초의 에스페란토인’이라는 뜻을 담은 ‘벽초(碧初)’를 호로 했다. 청록색은 에스페란토의 상징색이다. 벽초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지면에 고정란을 만들어 논객들의 글을 에스페란토로 실었다. 1920년 창간된 문학동인지 ‘폐허’ 표지에는 한자 ‘廢墟’와 에스페란토 ‘La Ruino’가 나란히 쓰였다. 1925년 창립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즉 카프(KAPF)는 에스페란토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의 약자다.
 

에스페란토는 폴란드 안과의사 루드비코 자라로 자멘호프가 1887년 만들었다. 자멘호프는 언어의 차이가 불화를 낳는 만큼, 모든 이들이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공통어가 있다면 분쟁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적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서자는 사해동포주의 이상을 지닌 ‘평화어’ 에스페란토에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이 열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에스페란토는 20세기 전반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전간기 대공황의 반동으로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발흥하면서 박해의 대상이 됐다. 나치 독일은 에스페란토를 유대인의 언어로 간주해 사용금지하고 사용자들을 처형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을 불온시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사용을 금지했다. 이런 시련을 딛고 에스페란토는 지금까지도 국제어로 널리 보급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한 달째 전쟁 중인 아르메니아 소녀들이 한글로 휴전을 호소하는 장면이 세계로 퍼지고 있다. 소녀들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등 한글 팻말을 든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를 두고 전 세계 BTS 팬들인 ‘아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온다. 아미들은 한국어를 공용어처럼 쓰는 데다 국제이슈에 적극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K팝과 한국영화 등을 한글로 검색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호소가 연관검색으로 뜰 것을 겨냥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글이 ‘평화어’로 쓰이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소녀들의 절박한 호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전쟁은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