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文樂)를 공연하는데 ‘구로고(黑衣)’는 필요불가결한 배역이다.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가린 채 인형을 뒤에서 붙잡고 조종하거나 무대에 소도구를 옮기는 역할을 하는 이가 구로고다. 관객들은 극에 집중하기 위해 구로고를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구로고 덕분에 인형들은 인간 못지않은 섬세한 동작을 펼쳐보일 수 있다. 과거 일본 정치도 총리(인형)를 실세 정치인과 관료들이 뒤에서 조종하는 ‘구로고 정치’였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기 파벌을 움직이며 막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상왕(上王)들이 드물지 않았다. 1972년부터 2년 반 총리를 지낸 뒤에도 10년 이상 일본 정계를 주무른 다나카 가쿠에이가 대표적이다. 다나카는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 때문에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뒤를 이은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도 ‘상왕 아베’ 정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스가 내각의 각료 20명 중 11명이 아베 정권 인물로 채워졌고, 아베 친동생은 방위상에 기용됐다. 스가 총리 스스로 외교정책에서 아베의 조언을 구하겠다고 했고, 아베는 각국 정상과 쌓은 친분을 활용해 외교특사로 나선다고 했다. 외교·안보에서는 아베가 총리 시절과 다름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아베가 총리에서 물러난 지 사흘 만인 지난 19일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퇴임 사실을 영령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리 ‘견장’을 떼자마자 주변국 눈치 볼 것 없이 ‘우익 본능’을 한껏 펼치고 있다. 그의 참배에 일본의 보수우익들은 후끈 달아올랐다. 아베의 소셜미디어에는 “(총리로서) 세번째 등판을 강하게 기대한다”는 댓글도 달렸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0~2008년 대통령직을 연임한 뒤 3연임 금지조항에 막히자 측근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 자리를 맡기고 총리로 내려앉았다가 복귀했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는 아예 총리 횟수에 제한이 없다.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퇴임과 재취임을 반복하며 4차례 재임한 전례도 있다. 어쩌면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가 세번째 총리 등극 플랜의 출발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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