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누명을 썼다가 지난 25일 대법원 판결로 7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홍강철씨는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받은 경험을 묻자 “1주일이 아니라 하루도 버티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가 갇힌 독방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구조였고, 폐쇄회로(CC)TV가 24시간 감시했다. 구치소에 머물며 검찰에 가서 조사받는 방식과 달리, 생활공간과 조사공간이 동일할 경우 피조사자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한다. 실상이 폭로되면서 조사기간이 단축되고, 독방 수용은 폐지됐다. 국가정보원법 개정으로 대공수사권도 3년 뒤 경찰로 이관된다. 하지만 국정원이 탈북인들을 조사하는 기본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홍씨 변호인인 장경욱 변호사는 “이대로라면 국정원의 간첩 생산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간첩 생산 시스템’은 끊임없이 가동되면서 숱한 희생자를 낳았다. 지난 26일 세상을 떠난 재일동포 2세 김승효씨는 서울대에서 유학 중이던 1974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 끝에 ‘간첩’이 됐다. 8년간 복역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20년간 입원해야 했다. 이제 그 올가미가 주로 한국 사회의 최약자인 탈북인들에게 씌워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난민으로 인정받는 탈북인들을 국정원이 강압수사하며 ‘잠재적 간첩’ 취급하는 근거는 국가보안법에 있다. 국가보안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이고, 북한 주민은 그 구성원들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문재인 정부 들어 사문화됐다는 말도 사실왜곡이다. 2018~2019년 2년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은 사람은 583명에 달한다. 남북경협 사업가가 하도급 계약을 목적으로 북한 개발자와 e메일로 연락한 이유로 기소됐고, 교사 4명이 북한 서적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올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교단을 떠났다. 그 책들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방북 당시 구입한 어린이 만화로 당국 허가까지 받았으나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문제가 됐다. 대법원은 안소희 전 파주시의원이 정당 행사에서 민중가요를 제창했다는 이유로 지난 5월 유죄를 확정했다. ‘진보’ 문재인 정부하에서 이렇다면, 보수정부로 바뀔 경우 국가보안법은 여의봉처럼 다시 커질 게 뻔하다. 현 정부에서 문제없던 일들이 나중에 단죄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국가보안법은 지난 72년간 대한민국의 ‘이면(裏面)헌법’이자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실질헌법’으로 군림해왔다. 권력은 ‘궁예가 관심법 쓰듯’ 사람들의 마음과 사상을 감별해 적으로 몰았다. 사람들은 머릿속에 ‘북방한계선’을 쳐놓고 조바심을 내며 살아왔다.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12년엔 풍자를 위해 북한 콘텐츠를 ‘리트윗’한 이가 구속 기소됐다. 해외에서도 히트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것은 뭇사람들에겐 코미디였지만, 제작진에겐 뒷골 당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 법조문 일부를 고쳤다 한들 골격 자체가 죄형법정주의에도, ‘행위형법’ 원칙에도 어긋나는 반인권적·전근대적 법률인 것은 변화가 없다. 국제인권단체들이 지속적으로 폐지를 권고해온 이유도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기본적 인권인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거나 개정해야 한다.”(휴먼라이츠워치 2010년 9월17일 논평)
한국의 ‘표현의 자유’가 국가보안법이 아닌 대북전단금지법(남북관계발전법)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실소할 일이다. 전단 살포는 평시에는 어떤 나라도 하지 않는 전쟁행위다. 대북전단금지법은 표현의 자유 자체가 아니라 그 방식을 규제하는 것일 뿐이지만 보수세력들은 막무가내다. 국가보안법에는 침묵하는 보수가 ‘대북전단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목청 돋우는 괴이한 광경은 가치 전도(顚倒)된 ‘국가보안법 체제’의 단면을 드러낸다.
국가보안법과 전단금지법을 등가물로 취급하는 건 당치 않지만, 일이 되도록 하는 차원에서 제안해본다. 보수세력들도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이 이번에 확인됐으니 여야가 국가보안법과 대북전단금지법을 함께 손보는 건 어떤가. 북한 주민들을 그토록 위한다면 애써 한국을 찾아온 탈북인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법도 용인해선 안 되지 않는가. 전면 폐지가 어렵다면 ‘제7조(고무·찬양)’만이라도 없애자.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공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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