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입국한 조성길 전 주이탈리아 북한 대사대리의 부인 이모씨는 처음부터 한국행을 내키지 않아 했다고 한다. 부모와의 동행을 거부하고 북한으로 돌아간 딸의 안위 때문이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이씨가 그간 겪었을 고통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오죽하면 입국 사실이 누설될 위험을 무릅쓰고 언론사의 문을 두드렸을까. 북으로 보내달라는 간청이 당국에 묵살된 뒤로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씨의 송환은 법 테두리 안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입국과정에서 보호신청서에 자필 서명을 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된 만큼 현행법상 북송(北送)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반국가단체’인 북한으로 보내는 것은 국가보안법에도 위배된다. 그렇다고 ‘북송 불가’로 결론짓고 묻어버리는 것은 천륜(天倫)에 어긋난다.
본의 아니게 한국에 있는 북한사람들은 이씨 말고도 더 있다. 중국 닝보(寧波)의 류경식당에서 일하던 북한 여종업원 12명은 2016년 4월 20대 총선 직전 영문도 모른 채 식당 지배인에 끌려 한국에 집단 입국했다. 얼마 뒤 북한은 가족들을 서울로 보낼 테니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멀쩡히 잘 지내는 줄로 믿었던 딸이 다시 만나기 힘든 곳으로 왜 넘어갔는지, 이유라도 들어보겠다는 부모들의 호소를 박근혜 정부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미 4년이나 지난 일이고, 대학에도 다니며 잘 적응하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국이 변호인 접견조차 통제한 탓에 그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2011년 탈북 브로커에 속아 남한에 입국한 김련희씨는 처음부터 줄곧 송환을 요구해 왔다. 당국은 김씨에게 여권은 내주되 ‘출국금지’로 묶어놨다. 정권이 바뀌면 이들의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가 낙담으로 바뀐 지도 오래다.
지난 8일 윤건영 더불어민주당이 국정감사에서 이씨와 종업원들, 김련희씨의 송환 문제를 거론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국민적인 공감대와 합의과정 아래 처리될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답했다. 통일부 장관이 공론화 필요성을 열어둔 것은 긍정적이지만,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임은 틀림없다. 북한이 주재국을 이탈한 외교관의 부인을 돌려보내라고 할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구원(舊怨)은 풀지 못할 망정 새로운 이산의 비극까지 정부가 방치해선 곤란하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뜻을 정확히 물어 원하는 이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게 마땅하다. 송환하겠다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정부는 27년 전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씨를 ‘가족방문’ 형식으로 송환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 종군기자였던 리씨는 도합 34년의 형기와 보호감호 기간을 마친 이듬해인 1989년 ‘월간 말’지에 북의 가족을 그리는 수기를 연재했다. 2년 뒤 남북회담 취재차 서울에 온 북측 기자가 부인의 답장을 전달하면서 그의 송환이 남북현안으로 떠올랐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직후 조건 없는 송환을 결단함으로써 리씨는 1993년 3월19일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장기방북’ 형식으로 송환했고, 정부는 그의 주민등록증을 회수했다.
이씨와 북한식당 종업원들, 김련희씨에게 ‘리인모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을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희망하는 곳에 정착하는 방안을 북측과 협의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 1992년 7월7일 노태우 정부가 북측에 제안한 바 있다. “불행했던 과거의 남북관계로 타의에 의해 상대측 지역에서 발이 묶여 있는 이산가족들에 대한 생사 확인과 상봉, 본인의 희망에 따른 귀환, 정착사업을 전개할 것을 제의한다.”(정원식 총리 대북서신)
이산가족의 심정은 형님과 작은 누님을 북에 둔 고 리영희 선생의 추석 회고담이 보여준다. “중추의 달이 거울보다도 환히 비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당에 나앉아서 몇시간을 두고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더 참을 수가 없게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없이 일어나 눈물을 닦으면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흐느껴 울었다.” 지금대로라면 이씨도 해마다 추석 달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 할 것이다.
이들의 송환은 북핵이나 대북제재와 무관한 ‘인간의 도리(道理)’에 관한 문제다. ‘가족의 만남을 정치가 방해하는 곳은 지구상에 한반도가 유일하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향의 눈]국가보안법 놔두고 ‘표현의 자유’ 외치나(2020.12.31) (0) | 2021.05.25 |
---|---|
[경향의 눈] '바이든의 전략적 인내' 없게 하려면(2020.11.26) (0) | 2021.05.25 |
[경향의 눈] ‘경항모는 되고 재난지원금은 안 된다’는 재정 형편(경향신문 2020.9.10) (0) | 2020.09.15 |
[경향의 눈] ‘제2차 토지개혁’ 더 미룰 수 없다(경향신문 2020.8.6) (0) | 2020.09.15 |
[경향의 눈]결국 대북전단이 문제였다(경향신문 2020.7.2) (0) | 2020.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