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먹방' 대신 배달을 해보라(2020.1.28)

서의동 2021. 5. 25. 21:25

남대문시장을 방문한 정치인들. 출처 : 뉴스1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3일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어묵을 먹었다. 민주당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예비후보들이다. 국민의힘 나경원 예비후보는 같은 날 양천구 신월시장에서 호떡을 먹었다. 선거철임을 알리는 정치인들의 ‘먹방’ 사진들이 포털 뉴스난을 장식했다. 
 

그런데 올해 먹방투어는 안 하느니만 못해 보인다. 코로나 시대에 예비후보와 수행원, 기자 수십명이 비좁은 시장통로에 뭉쳐 있는 것부터 우선 거슬린다. ‘국민들은 5명도 못 만나게 하면서 정치인들은 떼로 몰려다니냐’는 기사 댓글들은 틀린 게 없다. 모처럼 시장까지 와놓고 상인들과 제대로 대화하는 것 같지도 않다. 경기가 바닥이니 딱한 사정들을 꽤나 들을 법한데도 동영상을 보면 ‘어묵이 진시황 때 만들어졌다’ 따위의 ‘알쓸신잡’성 한담을 주고받는 장면만 도드라진다. 상인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긴 하지만, 왜 현장까지 와서 날것 그대로의 민생을 듣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왕정시대 민정시찰의 유습’이란 조롱을 받는 것이다. “높은 분이 왕림해 ‘밑엣것’들의 음식을 한번 잡수셔 보시고 ‘민심’을 살피신 뒤 선정을 베푸시는, 이런 세팅이죠.”(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페이스북) 시장 방문으로 ‘서민 이미지’를 만들기는커녕 ‘서민’들과의 간극만 더 벌어진 듯하다. 
 

정치인들의 민생탐방 자체를 탓할 건 없다. 문제는 늘 정해진 코스만 가려는 구태의연함에 있다. 보궐선거에 나설 정치인들은 당분간 삶의 현장 이곳저곳을 다닐 것이다. 기왕 시간을 낼 요량이면 한국 사회의 가장 고된 밑바닥까지 들어가볼 것을 권한다.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영국 산업지대 노동자들의 삶을 취재한 르포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탄광의 막장 체험을 그렸다. 오웰이 가장 놀란 것은 막장이 수직갱도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그 근처에 있는 게 아니라 승강기에서 내린 다음 어마어마한 거리를 이동해야 닿을 수 있다는 점이다. 탄층을 찾아 막장이 이동하면서 수직갱도에서 점차 멀어지기 때문이다. 막장까지 가려면 최소 1.5㎞, 길게는 8㎞에 이르는 높이 1m 안팎의 통로를 램프를 든 채 허리를 굽히거나 기다시피 하며 걸어야 한다. 천장에 부딪치지 않으려면 허리를 구부려도 고개는 세우고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은 목과 무릎, 허벅지에 강력한 통증을 수반하는데 오웰은 견학만 했는데도 다음날 다리를 못 쓸 정도로 아팠다고 한다. 광부들은 이렇게 출퇴근해서 따로 7시간반의 무지막지한 노동을 해야 했다. 
 

20세기 전반 광부들의 노동은 지상세계를 움직이는 불가결한 동력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 굽는 것부터 소설 쓰는 것까지 모든 것이 석탄과 상관이 있다.” 이 중요한 노동이 그토록 지옥 같은 줄 사람들은 몰랐고, 그래서 노동조건은 더디게 개선됐다. 
 

오늘날 택배노동은, 한국의 일상을 움직이는 데 필수적이면서 ‘몸을 갈아넣는’다는 점에서 오웰 시대의 막장노동과 닮았다. 택배노동자들의 공짜 노동 ‘까대기’(상자 분류작업)는 광부들의 힘겨운 출근길과 판박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려놓고 출근하는 심복선씨는 ‘까대기’와 짐싣기, 배달작업을 오전 7시부터 밤늦도록 한다. 심씨는 배달 도중 ‘한순간도 걷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경향신문 2020년 10월19일자 ‘까대기만 6시간 끝에 첫 배달’). 심씨를 취재한 최민지 기자는 “하루 따라다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했다. 
 

지난해 택배노동자 16명이 과로사했다. 하지만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는 올 들어서야 타결됐고, 그나마 택배회사들의 합의 위반으로 닷새 만에 파탄 위기를 맞았다. 이렇게 된 건 중재에 나선 정치인과 관료들이 그 노동이 얼마나 지독한지, 노동 개선이 얼마나 절박한 건지 감이 없던 탓도 있을 것 같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누더기가 된 것은 산업 현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정치인들이 겪어본 적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선 자리가 바뀌어야 풍경이 달리 보인다. 정부 관료들이 자영업 현장을 직접 들여다본다면 ‘곳간 집착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경로의존’ 정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편하게 주목받는 곳 대신 ‘수직갱도’를 타고 내려가야 보이는 이들의 삶과 노동에 다가가야 한다(몰려다니면 효과가 없다). 정치인들이 수시로 ‘하방(下放)’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혹여 ‘시장 선거가 택배노동과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 이가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