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향의 눈] '바이든의 전략적 인내' 없게 하려면(2020.11.26)

서의동 2021. 5. 25. 21:02

한미연합훈련 출처 :BBC

‘미국 오바마 정부 초기 북한이 쏜 미사일 한 방이 전략적 인내를 초래했다’는 인식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 ‘은하 2호’를 발사한 것은 2009년 4월5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 특별연설을 하기 몇 시간 전이었다. 세계의 시선이 프라하에서 일제히 평양으로 쏠리며 체면이 구겨지자 오바마의 대북 태도가 일거에 경직됐다. 
 

그런데 북한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한·미 양국은 북한 급변사태 대비 ‘작전계획5029’를 구체화한다. 한·미 군수뇌부는 ‘북한 정권교체’를 공공연히 거론했다.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은 공개석상에서 “북한에 대한 전면전, 북한의 불안정 사태, 정권교체 시나리오에 대비하고 있다”고도 했다. 잔뜩 날이 선 북한은 2009년 3월 북·미 장성급 회담에서 키리졸브 훈련 중단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연례적인 방어 훈련’이라며 일축했다. 훈련 실시에 북한은 로켓 발사로 대응했다. 임기 초반의 ‘강 대 강’ 대치에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태도가 얽히며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빠르게 탄력을 잃었다. 당시 북한의 권력승계를 위한 정치적 필요도 있었지만, 한·미연합훈련이 로켓 발사에 안성맞춤의 빌미가 된 것도 사실이다. 
 

1976년 팀스피리트 이래 수십년간 실시돼온 한·미연합훈련은 한반도 정세를 흔드는 중대 변수였다. 훈련에 따라 남북관계와 북·미 협상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북한은 줄곧 “공화국 북반부를 선제타격하기 위한 전쟁연습”이라고 반발했다. 연합훈련을 ‘디폴트’(기본값)로 여기는 한국인들에겐 괜한 생트집으로 비쳤지만, 양국 육·해·공 수만~수십만 병력이 연합해상·상륙작전, 야간기동훈련, 공수낙하훈련 등을 대규모로 전개하는 것은 북한에 현실적인 위협이었을 것이다.
 

1990년 9월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2~3년 만이라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듬해 3월 훈련이 실시되자 후속 회담의 평양 개최를 취소했다. 그해 11월 한·미가 훈련 중단을 결정하자 남북관계는 큰 걸음을 내디뎌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합의가 도출됐다. 그러나 1993년 3월 양군 12만명에 B-2스텔스 폭격기가 동원된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북핵위기의 서막을 열었다.
 

한·미훈련에 대한 북한의 거친 반응은 협상을 위한 기선제압용일 수도, 보수진영 주장처럼 한·미동맹 약화를 노린 전술일 수도 있다. 2014년 2월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키리졸브 훈련일정과 겹쳤는데도 진행된 걸 보면 예외도 있긴 하다. 그러나 훈련이 대체로 한반도 평화에 부정적이었고, 반대로 훈련의 중단·연기가 긍정적인 모멘텀으로 작용해 왔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2017년 12월19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올림픽·패럴림픽 기간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할 뜻을 전격 밝혔다. 북한이 미 본토까지 닿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호를 시험 발사한 지 불과 20일 만에 북한이 주장해온 ‘쌍중단’(한·미훈련과 핵·미사일 실험 동시 중단)을 수용한 것이다. 북한은 2018년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 참가 방침을 밝히는 것으로 화답했다. 한반도 정세가 급물살을 타면서 세차례 남북정상회담과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시선끌기 이벤트’ 이상을 넘지 못했다. 지난해 6월 말 판문점 회동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8월 한·미연합훈련 취소를 요구했지만 한·미 양국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북한은 스톡홀름 실무협상을 깨는 것으로 트럼프의 ‘희망고문’에서 벗어났다.
 

조 바이든 당선자의 대북정책 기조는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현실주의에 입각해 있다. 그렇다고 해도 2009년 상황이 재현되지 말란 법은 없다.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공백을 줄이는 것 이상으로 한반도 정세의 경직을 막아야 한다. 북·미 모두 첫인상을 그르쳐 좋을 일이 없다. 그 관건이 내년 상반기 한·미연합훈련의 연기임은 ‘북핵 30년’ 역사에서 알 수 있다. 무력시위를 벌이며 협상하자는 ‘19세기식 함포외교’에서 이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8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물었다. “연합군사훈련은 누구를 저지하려는 것이며, 누구를 패배시키고 공격하려는 의도인가.” 바이든 시대에도 이 질문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최대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