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FTA 취재기자들을 위한 변명

서의동 2010. 11. 12. 00:32
통상정책을 담당하는 통상교섭본부는 외교통상부의 조직이다. 이 본부장은 외교부 장관에 비해 서열이 낮지만, 대외적으로는 통상장관으로 통하는 장관급이다. 이 통상교섭본부를 언론사들의 경제부 기자들이 취재한다. 
 
언론사 경제부에서 통상교섭본부는 인기없는 출입처다. 경제부에선 주로 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등이 주류 출입처로 불린다. 하지만 통상교섭본부는 변변한 기자실도 없고, 기자들끼리도 잘 모른다. (외교부 청사 1층에 부스 몇개가 있긴 하다)
즉,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야기하듯, '기자실에 몇몇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서 기사방향을 주도하는' 식의 출입처와 전혀 거리가 멀다. 


8일 서울 외교통상부에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고위급 실무협의에서 해결하지 못한 쟁점 현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기자들이 통상교섭본부만 취재하기보다는 다른 출입처를 겸한다. 소위 '가께모찌' 다. 기자들은 이 별로인 출입처를 되도록 빨리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끼리 모래알이 되기 십상이고 전문성도 쌓이기 힘들다.  

그러나 대외개방 기조가 강화되면서 통상교섭본부의 역할은 막중해졌다. 그 결정적 계기는 한미 FTA다. 

외교부의 변방조직이던 통상교섭본부는 어느 틈엔가 막강파워를 자랑하는 무소불위의 조직으로 성장했고, 통상관료들의 말한마디에 국내 정책의 생사가 좌우될 정도가 됐다.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조직도 크게 불어났다. 

여기서 언론과 취재원 간의 불균형이 발생한다. 
파워가 커진 만큼 그 업무와 정책수행을 언론이 제대로 감시해야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감시의 사각지대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통상정책은 용어부터 어렵고 복잡하기까지 하다. 
최근 들어 언론에 가끔 등장하고 있지만 역진방지조항(영어로 래칫), 스냅백(관세원상복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중의 간접수용, 현재유보와 미래유보 등등 듣보잡에 가까운 개념들을 익혀야 한다. 
 
섬유의 원산지규정에는 얀포워드란 것도 있고, 자동차 원산지를 따지는 용어도 별도로 있다. 상대국의 정책이 규정을 위반하지 않아도 투자자가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할 경우 제소할 수 있는 비위반제소라는 항목도 한미 FTA에 포함돼 있다. 
통상협상에는 FTA같은 양자간 협상이 있는가 하면 DDA(도하개발어젠다)로 불리는 다자협상도 있다. 농업보조금에는 그린박스와 블루박스 등이 구분돼 있어 어느것은 철폐대상, 어느것은 허용대상이다. 

이처럼 개념자체가 어렵고 복잡하지만 도움말을 들을 통상전문가들도 그다지 많지 않다. 얼추 때려잡는 수준정도로 개념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통상관련 사안들은 평소에 별로 기사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경제전문지는 좀 다르겠지만) 그래서 기자들이 어려운 공부를 할 유인도 거의 없는 셈이다. 꾸준히 기사를 쓰면서 취재하기 보다는 큰 일 터질 때 배우면서 기사쓰는 식이다. 

이런 열악한 언론상황에서 2006년 한미 FTA가 급발진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 날카롭게 문제점을 짚어내는 기자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기자들이 취재대상으로부터 개념을 설명받는 식으로 취재를 했다. 적어도 개념파악 정도는 돼 있어야 취재를 통해 비판기사를 쓸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협상과정에서 등장한 개념들을 소개해주는 데 급급한 경우도 많았다. (필자도 그 범주에 속한다)




한미 FTA가 2007년 4월 타결된 이후 정부가 유럽연합과 FTA를 추진할 당시엔 그래도 한미 FTA에서 고생하면서 쌓아둔게 조금은 있었던지 비교적 수월했다. 하지만 뭔가를 조금 알 정도가 됐을 때 출입처가 바뀌는 기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자실이란 게 일반적으론 아주 나쁜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많다. 실제로 예전엔 나쁜 짓도 있었다. 
하지만 기자실의 순기능이 아예 없지는 않다.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같이 있다보면 정보교환도 이뤄질 수 있고, 그래서 취재력이 함께 올라갈 수도 있다. 특히 통상담당 기자들은 이런 필요성이 더 큰 편이다. 
 
세월이 흘러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선반위에 놓여 먼지가 쌓였던 한미 FTA는 마침내 올 6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실무협의라 부르는 FTA추가협상이 시작됐지만 문제는 이를 감시할 기자들의 능력에 있었다. (물론 취재기자들 전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3년전에 이뤄졌던 FTA협상을 취재했던 기자들은 지금 거의 남아있지 않고 다른 출입처로 옮겼다. 게다가 본협상 당시인 17대 국회에서는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 민주당 최재천 의원 등 FTA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의원들이 기자들에게 기사꺼리를 공급하기도 했지만 18대 들어서면서 그런 '선수급' 의원들은 거의 전무하다.  
 
지금 취재현장을 채우고 있는 기자들 중엔 신참들이 많은 듯 보인다. 전문성을 쌓을 기회 없이 노련한 통상관료들이 벌이고 있는 협상의 현장에 펜을 쥐고 뛰어든 셈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기자들도 있을 것이다) 

한미 FTA는 국민경제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협정이다. 이 FTA 때문에 바꿔야 할 국내 법만도 수십개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워낙 범위가 넓기 때문에 경제부 기자들만으로도 커버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번 추가협상의 의제인 자동차는 사실 산업을 담당하는 산업부의 영역이고, 온실가스 배출기준 문제는 환경부 출입기자의 영역이다. 투자자-국가 소송제 같은 경우는 법조기자들이 들여다봐야할 사안들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통상정책은 엄청나게 중요해진 취재영역이지만, 기자들의 감시능력은 떨어진다는 점이다. 1차적으론 기자들의 책임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기자 개개인의 탓으로만 돌려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언론의 취재시스템이 바뀌거나, 기자들이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 정부로서도 통상전문기자들이 많아질 수록 균형있는 정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기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넋두리가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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