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중·일 전쟁 발단 ‘비운의 다리’
일본의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가 2003년 신차 프라도를 중국에 출시하면서 신문에 큼지막한 광고를 냈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다리를 질주하는 프라도에 돌사자상이 절을 하는 광고를 접한 중국인들이 격분했고, 항의가 빗발치면서 도요타는 이 광고가 게재된 신문을 전량 회수·폐기해야 했다. 중·일 전쟁의 상흔이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 중국인들에게 이 광고가 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1937년 오늘. 중국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소도시인 루거우차오 근처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보병 1연대 제3대대 8중대가 야간연습을 하던 중 몇발의 총성이 울렸고,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됐다. 행방불명 중인 줄 알았던 사병은 용변 중이었고, 밤 11시쯤 대열에 복귀했지만, 몇발의 사격이 일본군의 자작극인지, 중국내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중국군에 의한 사격으로 간주하고, 다음날 중국군을 공격해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이어 군대를 증파했고, 20일 뒤인 7월28일에는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며 전면전으로 비화됐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면서 12월말 난징(南京)을 점령했고, 30만명의 민간인을 무참히 도륙한 난징대학살이 일어났다.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하기 반년 전인 1936년 12월12일 중국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이 국공내전 중단을 요구하며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蔣介石)를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납치·구금하는 서안사변이 발생했고, 이 사건 이후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한 채 항일전선 구축에 들어갔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국 본토에 대한 본격 침략을 앞두고 정세변화에 초조해진 일본이 전단을 마련하기 위해 자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국제 역사학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대체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나’에 집착해 왔고, 중국군이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이라는 역사적 맥락에는 눈을 감은 채 지엽적인 팩트에 집착하는 본말전도식 역사해석의 대표 사례일 것이다.
세월은 흐르지만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잔류하며 살아 움직인다. 루거우차오 사건 71주년인 지난해 7월7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도야코(洞爺湖) G8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이 화제가 된 일과 도요타 광고를 실은 신문이 폐기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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