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자결 강요’ 가슴에 맺힌 恨은 남아
64년 전 오늘 감청색 바다와 흰 모래밭이 아름다운 동중국해의 류큐(琉球)제도에 석 달간 몰아쳤던 피바람이 마침내 멎었다. 제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1일부터 6월23일까지 83일간 치러진 류큐제도의 오키나와섬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간 전투는 양측의 인적·물적 피해도 막대했지만, 오키나와인 12만명이 무참하게 살해되거나 자결을 강요받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군은 일본 본토진격 작전을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해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사이먼 버그너 중장의 지휘 아래 18만3000명의 대규모 병력이 투입됐고, 상륙지점인 가네다만 주변에는 미리 3만발의 포탄을 쏟아부어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滿) 중장을 사령관으로 한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4월1일 미군상륙 이후 나흘간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투는 4월5일부터 일본군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슈리(首里)성의 동굴진지로부터 미군을 향해 총탄이 불을 뿜으며 치열한 교전상태에 돌입했다. 미군은 무수한 동굴참호를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제압했고,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양측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처참한 백병전 끝에 미군은 5월29일 슈리성을 함락시켰고, 일본군 지휘부는 섬 남쪽으로 퇴각했다.
6월11일 오로쿠(小祿) 지구에서 일본 해군 지휘관 오오타 미노루(大田實)와 그의 군대 전원이 옥쇄했고, 6월15일에는 남은 병력 6000여명이 미군의 화력에 괴멸됐다. 마침내 6월23일 오후 4시30분 우시지마 중장과 쵸 이사무(長勇) 소장이 할복자살하면서 전투는 끝났다.
석 달간의 전투과정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도 자결을 명해 주민들은 일본군이 건넨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졸라 죽이는 참극이 발생했다. 또 일부 주민들은 일본군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살해당하면서 근대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비극이 연출됐다. 이 전투에서 숨진 오키나와 출신 병사 및 주민은 12만명으로 본토 출신 일본군 사망자(6만명)의 두 배에 이른다.
본래 류큐제도는 19세기 후반에 일본에 복속되기 전까지는 일본과 중국 간에 균형외교를 펼쳐온 자치국이었고, 편입 이후에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간직해왔다. 그런 이곳 주민들에게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본토에 대한 저항감을 갖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7년 9월 문부과학성이 오키나와 주민 집단자결 사건에 대한 교과서 기술을 삭제·수정하려 하자 오키나와 주민 11만명이 규탄대회를 열며 반발, 문부성의 역사왜곡 시도를 무산시켰다.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 시도는 이웃나라뿐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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