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희생으로 ‘6월 항쟁’ 들불되다
2007년 7월5일 광주 진흥고교에서는 이 학교 동문인 이한열 열사의 서거 2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 등과 진흥고 재학생, 연세대생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행사에서는 조각가 정해만씨가 제작한 높이 80㎝의 흉상의 제막식도 함께 열렸다. 배 여사는 ‘그대 왜 가는가, 어딜 가는가’라는 추도문이 뒷면에 새겨진 흉상을 연방 어루만지며 가슴에 묻은 아들을 추모했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전두환 정권의 개헌논의 탄압으로 정국이 한치 앞을 가늠하기 힘들던 1987년 6월9일 연세대에서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이던 이한열은 집회가 끝난 뒤 동료학생들과 가두진출을 시도하다 전투경찰에 쫓겨 교문으로 뛰어 들어가던 도중 최루탄 SY-44에 뒷머리를 가격당한다. 경찰이 30도 이상 각도로 발사토록 돼 있는 사용수칙을 어기고 학생들을 겨냥해 쏜 최루탄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피가 얼굴로 번졌고, 코에서도 피가 났다.
인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질 때만 해도 이한열은 “뒤통수가 아프다” “나 괜찮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세상에 남긴 뒤 오후 5시30분쯤 영원히 의식을 잃었다.
대낮에 한 청년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고, 다음날부터 시작된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현장에 있던 이종창씨(42·당시 도서관학과 2년)가 쓰러진 이한열을 일으켜 부축하던 장면은 로이터통신에 의해 세계로 타전됐고, 80년대 학생운동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이한열은 27일 만인 7월5일 새벽 2시5분 끝내 숨을 거뒀다. 나흘 뒤인 7월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과 노제는 연세대 본관-신촌로터리-서울시청앞-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진행됐고, 서울시청앞 30만명, 연대-신촌-시청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30만명 등이 모여 이 열사의 산화를 애도했다.
그가 찾으려 했던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는 위기감 탓인지 한동안 잊혀졌던 그의 이름이 다시 불리고 있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지난 5일 오후 2시 발표한 시국선언에서 “1987년 이한열 선배가 외치던 민주주의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우리의 품으로 되돌리려는 것이었다”며 “국민의 수많은 희생으로 일구어낸 민주주의가 2009년 현재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해 있음에 분노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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