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일본 도쿄 나가타초(永田町) 국회의사당의 참의원(상원) 예산위원회. 간 나오토(管直人) 총리가 민주당의 매니페스토(정권공약)에 대해 “재원 전망이 다소 안이했던 점도 있다. 불충분함이 있었던 데 대해 국민에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자녀에게 월 2만6000엔(35만원)을 주는 ‘아동 수당’ 등 핵심공약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인정한 것이다. 간 총리의 사과발언이 나오자 “결국 사기로 정권을 잡은 셈 아니냐”는 야당의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일본 정치에서 매니페스토가 갖는 함의는 작지 않다. ‘이념, 수치, 재원 기한 등을 명시한 구체적 선거공약’으로 실현 가능한 대국민 정치약속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만큼 매니페스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간 총리는 일본 정치에서 매니페스토 선거를 정착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민주당은 자녀 1인당 월 2만6000엔의 아동 수당지급, 고교교육 무상화, 고속도로 무료화 등을 내걸고 2009년 8월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압승했다. 54년간 지속된 자민당 일당체제를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다. 관료 의존적이고 타성적인 자민당 정치시스템에 대한 해묵은 반감, 고이즈미 구조개혁의 결과로 초래된 격차사회와 신 빈곤이 유권자로 하여금 민주당에 몰표를 던지도록 했다. 민주당의 선거공약은 도시 중하층과 농촌 등 취약계층에 대한 소득과 복지지원이 핵심이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괴멸상태에 있는 취약계층을 지원해 내수를 강화하고 경기회복을 유도하겠다는 것으로 취지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처음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의욕은 앞선 반면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은 치밀하지 못한 ‘아마추어’였다. 첫 총리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는 기득권층을 깨려다 관료집단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여기에 민주당 의원들의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민주당도 별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오랫동안 자민당 정권과 협력해온 일본 언론들은 민주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집요했다. 일부 언론들은 매니페스토의 아동 수당, 고교무상화, 농가소득호별보상제, 고속도로 무료화의 첫글자 발음을 따서 ‘바라마키(バラマキ) 4K’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바라마키는 일본어로 ‘마구 뿌린다’는 뜻으로 우리의 ‘퍼주기’에 해당한다.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공약들을 내걸면서도 증세 등 근본적인 재원조달 방안은 내놓지 않는 민주당 정권의 허점을 파고 들었고, 여론도 결국 등을 돌렸다.
일본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격차가 확대되고, 빈곤층이 늘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내년 두 차례 선거는 복지정책의 대결장이 될 것이 확실하고, 어느 당이 집권하든 복지확대 요구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일 것이다. 다만, 주도면밀한 실행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으면 일본처럼 역풍이 불 수도 있다. ‘복지, 솜씨있게’ 일본 민주당의 실패가 한국에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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