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 아이돌그룹 카라가 최근 신곡과 함께 선보인 안무가 일본 중년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1980년대 후반 일본 나이트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빠라빠라 댄스’와 흡사한 카라의 몸동작을 지켜보며 그들은 향수에 젖어든다. 당시는 주가가 자고 나면 치솟고, 넘치는 돈을 감당못해 해외 부동산을 마구 사들이던, 쇼와(昭和)시대(1926~1989년) 막바지이자 일본경제의 황금기였다. 샐러리맨들은 퇴근 뒤 긴자의 호화술집으로 직행하거나 롯본기의 나이트클럽에서 흥청망청 돈을 뿌려댔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났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패전 이후의) 쇼와시대를 그리워 한다. 2005년에 영화 <올웨이스-3번가의 석양> 상영을 계기로 시작된 ‘쇼와붐’이 7년째 지속되는 중이다. 요미우리 신문은 매주 토요일 한면에 걸쳐 쇼와시대를 되돌아보는 특집기사를 내보낸다. 최근에는 두차례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의 이야기가 실렸다.
1970년대를 석권한 일본의 아이돌 듀엣 '핑크레이디'/출처= http://www2u.biglobe.ne.jp/~pinkmk/
일본 TV에 중년이 된 쇼와시대 아이돌이 현역들 못지않게 얼굴을 내밀고, 70~80년대의 자료화면들이 번번이 방영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쇼와를 팔면 시청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구매력 있는 중년세대를 겨냥한 카라의 마케팅 전략은 적중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쇼와시대에 대해 “패전에서 벗어나 전국민이 성장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희망의 시대, 가난해도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꿈과 따뜻한 가족애가 있던 시절”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좋던’ 쇼와시대에 일본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기회를 놓쳤다. 고속성장으로 경제대국이 된 뒤에는 성장주의에서 벗어나 인적투자와 사회복지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했어야 했다. 일본 정부는 복지부담을 기업에 떠맡겨 놓은 채 뒷짐만 지고 있었다. 쇼와시대가 막을 내리고 거품이 꺼지자 정부는 엉뚱하게 세금을 줄이고, 건설투자에 돈을 쏟아부으며 재정을 낭비했다. 그 결과 내수기반이 붕괴되고 ‘워킹푸어’가 확산되는 격차사회로 급속히 쇠락해 갔다.
일본이 장기불황에 빠진 90년대 이후 성장기를 보낸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산다. 이런 탓에 결혼을 꺼리면서 지난해 일본의 독신가구는 31.2%로 세계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성세대들은 이런 젊은층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젊은층은 자신들을 마뜩치 않아 하는 기성세대의 시선을 불편해 한다. 고교를 중퇴하고 프리터 생활을 하는 아들과 반목하는 40대 주부의 이야기를 다룬 요즘 드라마를 보면 두 세대간에 패인 골이 얼마나 깊은 지 드러난다.
현상변화를 바라는 일본 국민의 열망이 2009년 정권교체로 이어졌지만 일본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개혁에 저항한다. 헛돈을 쓰느라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부채 탓에 여력도 별로 없는 데다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대참사가 설상가상으로 겹친 형국이다. 이래서 20년전쯤 해결했어야 할 사회보장과 세제개혁 논의가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과 흡사한 경로를 밟아온 한국에서 복지담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늦었지만 희망적인 현상이다. 최근 방일한 한 관료는 "복지투자를 본격화하려면 좀더 성장해야 한다"고 했지만 복지에는 타이밍이 있다. 일본은 그 타이밍을 놓쳐 이 지경이 됐다. 일본의 쇼와시대가 한국에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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