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로제타와 한국사회

서의동 2009. 3. 2. 19:12

17세 소녀 로제타는 공장에서 해고된 뒤 와플 한 조각과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온종일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나날을 보낸다. 그런 로제타를 좋아하는 와플가게 종업원 리케는 어느날 로제타의 저녁거리로 물고기를 잡는 일을 돕다 저수지에 빠진다. 그녀는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를 놔둔 채 숲으로 도망친다. 그가 죽으면 그의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되돌아가 리케를 살려 내지만, 그가 와플을 몰래 빼돌려 판다는 사실을 와플가게 사장에게 일러 결국 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가 한 청년 실업자의 가혹한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영화 < 로제타 > 의 한 장면이다. 관객들을 시종일관 불편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1999년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청년 실업의 심각성을 고발했다.

 < 로제타 > 의 '울림'은 컸고 마침내 벨기에는 이듬해인 2000년 청년고용 대책인 '로제타 플랜'을 시행한다. 50명 이상을 고용하는 민간기업은 고용인력의 3%에 해당하는 일자리에 청년실업자를 의무적으로 채용하도록 했다. 이를 어긴 기업에 대해 1명당 74유로의 벌금을 매일 부과했고, 의무를 이행한 기업에는 고용인원에 대한 첫해 사회보장 부담금을 면제해 줬다.

 지난 1월 < 대통령과의 원탁대화 > 방송토론에서 패널로 나선 조국 서울대 교수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로제타 플랜을 제안했다. 조 교수는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인턴정책이 청년실업 유예정책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꺼냈지만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한국에서는 '잡셰어링(일자리 나누기)'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제2의 금모으기'라는 찬사까지 나왔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보다는 임금 삭감이 핵심목표가 되고 있다. 일자리 공유를 위해 노·사·민·정의 대타협을 발표한 지 얼마 안돼 대졸 초임을 최대 28%나 깎는 삭감안을 내놨지만 일자리 대책은 쏙 빼놓은 전경련의 태도가 이를 말해준다. 잡셰어링도 '기업 프렌들리'라는 가이드라인을 넘지 못한다. 잡셰어링을 통해 기업들은 노동비용을 깎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셈이다. 근로시간을 줄여 고용을 늘리고, 남는 시간을 교육훈련으로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이 이명박 정부하에서는 '불온한 발상'일 뿐이다.

 일자리를 잃은 로제타의 일상은 이미 양심과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물에 빠졌을 때 왜 도망쳤느냐는 리케의 물음에 "일자리 때문"이라고 말하는 로제타에게 연애감정은 사치일 뿐이다.

 이미 우리 사회엔 로제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올 봄이면 고교와 대학에서, 직장에서 또다른 로제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을 지키라고 누가 충고할 자격이 있을까. 상위 1%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정부와 사람값을 깎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기업들이 버티고 있는 이 나라에서.
20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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