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대지진1년] 넓어지는 '탈원전' 대오...진보 전유물 탈피

서의동 2012. 3. 12. 14:05

ㆍ일본 기업인·극우도 “탈원전” 목소리

“좌익은 ‘탈원전’이고 보수는 ‘원전 추진’이라고 구별짓는다. 하지만 본래 기술에 대한 신앙은 진보주의이며 보수는 기술진보를 의심하게 마련이다. 보수야말로 탈원전을 주장해야 한다.”

극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58)가 지난해 12월 한 잡지에 ‘탈원전’ 주장을 담은 만화를 게재해 일본 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고바야시는 <전쟁론>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옹호하는 논리를 펴온 극우 인사로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를 만드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서도 활동한 바 있다. 그런 그가 보수적 관점에서 볼 때 원전은 지나치게 위험하므로 중단해야 한다는 탈원전 논리를 편 것이다. 


지난해 3월11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방사성물질 유출사고를 계기로 원자력에서 벗어나자는 탈원전 주장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3·11 이전엔 진보진영의 전유물이던 반원전 운동이 기업인은 물론 극우 사상가들까지 합류하며 세를 불리고 있다.

새역모의 대표를 지낸 극우 사상가 니시오 간지(西尾幹二·77) 전기통신대 명예교수도 지난해 7월 보수 월간지인 ‘윌’에 ‘탈원전이야말로 국가영속의 길’이라는 기고를 게재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뒤 원전은 경제면에서도 합리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됐고, 국가와 역사에 해를 가하는 점을 알아버린 이상 선택을 바꾸는 것에 주저하면 안된다”고 밝혔다. 니시오 교수는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가 수도권인 시즈오카(靜岡)현의 하마오카(浜岡) 원전 가동을 중단한 것에 대해서도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태양광 등 자연에너지의 보급을 늘리면 탈원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극우 보수 인사의 탈원전 논리는 원전이 국가안보에 해가 될 뿐 아니라 자연환경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바야시는 “원전은 국가 안전보장상 지나치게 위험하니 멈춰야 한다. 애국자라면 탈원전을 주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시오 교수도 “보수로 분류되는 지식인들에게 왜 아름답게 보존해야 할 국토를 수만년 동안 오염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적지 않은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원전 문제는 이데올로기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보수성이 강한 기업·금융 인사들 사이에서도 탈원전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수도권 금융기관인 죠난(城南)신용금고 요시와라 쓰요시(吉原毅·57) 이사장은 금융기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탈원전 선언을 한 뒤 후쿠시마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과의 금융거래를 해지하고, 절전 관련 사업자에 금리우대를 해주고 있다. 올해부터는 도쿄전력과 전력공급 계약을 끊고, 도쿄가스 계열의 가스화력 발전회사 ‘에넷’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 회사의 경영방침도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안심할 수 있는 사회’로 바꿨다. 그는 지난해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수습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업) 스스로 절전하고 고객을 이끌어 원전에 대한 의존을 줄여나가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일동포 기업인 손정의(孫正義·일본명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사장은 원전사고를 계기로 태양광발전소 등 자연에너지 보급 전도사로 나섰다. 그는 지난 6일 교토(京都)시 1곳, 군마(群馬)현 1곳, 도쿠시마(德島)현 2곳에 태양광발전소를 지을 계획이며 교토시와 군마현 발전소는 4월에 착공해 7월부터 가동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최대 인터넷 대기업 ‘라쿠텐(樂天)’의 미키타니 히로시(三木谷浩史·47) 사장은 지난해 원전사고 이후에도 현재의 독점적 전력산업 체제를 용인하는 재계단체 게이단렌(經團聯·일본경제단체연합회)의 태도에 반기를 표명하며 게이단렌을 탈퇴했다. 

문화·연예계의 유력 인사들도 속속 탈원전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일본의 ‘국민배우’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67)는 지난해 7월31일 히로시마(廣島)시에서 열린 일본어머니대회에서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 원전이 사라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요시나가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서 “(핵재처리시설인) 고속증식로는 무섭다는 이야기는 들어왔지만 일반적인 원전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뒀어야 한다”고도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77)는 원전사고 이후 ‘행동하는 지성’을 실천하고 있다. 오에는 지난해 9월19일 도쿄 메이지공원에서 6만명이 참가한 탈원전 집회를 주도한 바 있으며 오는 7월에도 10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탈원전 집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탈원전, 탈성장주의 vs 원전유지, 성장주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일본에서 일고 있는 '탈원전' 논쟁은 일본의 향후 경제 패러다임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제조업 수출에 의한 성장이라는 재래형 경제구조가 유지돼야 한다는 기존 산업계는 원전추진을 강조한다. 반면, 성장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쪽은 '성장 이데올로기'의 상징물이기도 한 원전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일본 도시샤(同志社)대 하마 노리코(浜矩子) 교수는 탈성장과 탈원전을 동시에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경제학자다. 그는 "일본은 인구가 줄어드는 사회인 만큼 전력수요가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원전이 없는 경제체제를 구상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일본이 제조업 중심의 성장론에 집착하는 대신 해외투자로 벌어들인 부를 재분배해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경제와 지역공동체의 내실화에 힘을 쏟자는 논리를 펴고 있다. 가네코 마사루(金子勝)게이오대 교수도 지난해 출간한 '탈원전 성장론'을 통해 원전으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에너지 체제에서 탈피해 지역분산형 경제체제를 재구축하자고 주장했다. 
탈성장론자들은 의료·복지·교육·신에너지 등을 중심으로 하는 내수산업이 향후 일본의 경제정책에서 역점을 둬야 할 부문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성장론자들은 성장하지 않으면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조차 어려워진다는 논리를 펴며 성장론을 옹호하고 있다. 또 일본 경제의 중추는 제조업이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값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원자력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도체 등 정밀한 공정이 필요한 대규모 공장의 전력을 불안정한 에너지원인 태양광, 풍력 등으로 유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논리다. 전자·자동차 등 거대 장치산업과 전력회사들이 주축인 재계단체 게이단렌(經團聯)이 이런 논리를 내세우며 원전 재가동론을 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원전사고와 폐로비용 등을 감안하면 원전이 화력이나 수력에 비해 싸지 않다는 조사결과가 드러나면서 원전옹호론의 한축이 무너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