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보의 갈라파고스화

서의동 2012. 5. 17. 10:02

일본 나가노(長野)현 기타사쿠(北佐久)군에 아사마(淺間)라는 이름의 산장이 있다. 일본 수도권의 휴양지인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멀지 않은 이 산장에서 40년 전 벌어진 열흘간의 농성사건은 일본의 혁신운동의 운명을 바꿔놨다. 

1972년 2월19일 혁신운동 조직의 한 분파인 렌고세키군(連合赤軍) 조직원 5명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장에 잠입했다. 이들은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은 채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경찰 2명과 민간인 1명이 죽고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은 이 사건의 마지막 날인 2월28일에는 경찰이 중장비를 동원해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 진압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돼 89.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열흘간의 총격전보다 일본 국민을 더 전율케 한 것은 ‘내부공산주의화의 순화’라는 명목 아래 자행된 내부린치였다. 체포된 이들은 무장투쟁을 위한 산악훈련 과정에서 14명의 동료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우치게바(內ゲバ)로 불린 내부항쟁과 린치는 일본 혁신운동에 커다란 멍에였지만 그 잔혹상이 이토록 낱낱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총괄’ 과정에서 조직원들은 스스로 혁명정신에 투철하지 못했다는 자기비판을 해야 했고, 이에 리더가 명령을 내리면 나머지 조직원이 달려들어 집단폭행을 한다. 사형이 언도된 이들은 망치나 칼과 얼음송곳으로 잔인하게 살해된다. 영하의 험준한 산악에서 경찰의 포위망이 점차 죄어오는 극한적 조건 탓인지는 몰라도, 당시 증언에서 자신들이 ‘악마’였다는 자각은 엿보이지 않는다. ‘매우 유감스럽긴 하지만 불가피한 과정’ 정도로 간주했던 것 같다. 

이 광기어린 살해극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일본의 혁신운동은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반면 세키군은 ‘세계동시혁명’을 주창하며 텔아비브 공항 습격사건과 같은 수많은 테러를 저지르면서 과격성을 더해갔다. 1960년대 미·일 안보조약의 비준 거부를 요구하는 ‘안보투쟁’에서 한때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일본의 혁신운동은 이처럼 여론과 유리된 채 몰락해갔다.

‘왼쪽 날개’를 잃은 일본은 자민당의 일당독주가 지속되면서 보수화의 길로 달려갔다. 사회당과 공산당이 이따금 견제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고도성장 결과 삶이 윤택해지고 전 국민이 중류층이라는 의식이 번지면서 사회문제에는 둔감해졌다. 보수화된 노동조합은 비정규직의 확산을 외면했고, 권력의 잘못에 시민들은 눈을 감았다. 정치에 관심을 갖거나 시위에 참가하는 일이 터부시되면서 건강한 사회운동마저 입지가 좁아졌다.


갈라파고스제도에 서식하는 바다이구아나/위키피디아


일본의 혁신운동과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 부정이 드러난 통합진보당을 같은 도마에 올릴 수는 없다. 망상에 빠져 과격화된 일본의 그들과, 군사정권의 폭력에 맞서 민주화에 헌신해온 이들의 삶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당권파에 속한 이들이 회의장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그간 조직을 운영해온 방식을 접하며 느끼는 전율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의 그들에게서 받는 느낌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당시 일본 사회는 혁신운동이 몰락하더라도 견딜 만큼의 역량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도 ‘진보’의 몫으로 남아있는 숙제들이 많다. 진보운동에 대한 기대감은 지난달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가 얻은 10.3%의 득표율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정치적 무관심이 확산돼 진보적 가치가 외면당하면 한국사회는 더 퇴행할 것이다. 

일본 혁신운동은 여론과 동떨어져 제 갈길을 가는 ‘갈라파고스화’로 치닫다 괴멸했다. 지금 불거진 갈등과 모순을 제대로 치유하지 않으면 한국의 진보운동이라고 그리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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