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

사면초가에 몰린 일본 외교

서의동 2012. 8. 21. 15:49

“구체성 없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꺼내들었다가 미국에 혼이 난 뒤로는 미국 눈치를 더 심하게 보게 됐다. 총리가 1년마다 바뀌다 보니 외교의 주도권이 보수 포퓰리즘 세력들에게 넘어가버렸다.” 

 

한·일 관계에 밝은 일본의 한 전문가는 최근 중국, 한국과 갈등이 격화되면서 ‘사면초가’에 놓인 일본 외교의 문제점을 이렇게 분석했다. 

 

2009년 장기집권해온 자민당을 총선에서 물리치고 집권한 민주당 정부의 외교는 한 번도 합격점을 받아본 적이 없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초대 총리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표방하며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역량과 상호 의존관계 심화 및 확대를 주창했다. 


하지만 구체성과 실행계획이 결여된 이 구상은 오키나와(沖繩)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갈등이 불거진 뒤로 퇴색하더니 간 나오토(菅直人) 내각으로 바뀐 뒤로는 사실상 폐기됐다.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던 ‘대등한 미·일관계’ 구상 역시 슬그머니 사라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집권한 뒤에는 ‘미·일동맹 복원’이 외교 최우선 과제가 돼버렸다. 냉정한 현실인식에 기반하지 않은 대외정책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미국과의 갈등을 거친 이후 일본은 외교적 자율성이 현저히 떨어지며 미국 ‘눈치보기’가 더 심해졌다. 노다 내각은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협정(TPP) 참가 협상에 참가를 선언하고, 후텐마 기지이전 문제에 속도를 내겠다는 몇가지 약속을 해주며 미국의 환심을 샀다. 중국의 해양진출이 강화되자 일본은 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매달렸다. 

 

반면 2010년 9월 센카쿠 해상에서 벌어진 중국어선과 일본 경비정 충돌사태에 대한 대처미숙이 ‘굴욕외교’ 논란을 빚으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유화정책의 설자리는 점차 좁아졌다. 간 총리가 2010년 8월15일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 사죄담화를 한 것이 민주당 정권 동아시아 외교에서 거의 유일한 성과로 꼽힌다. 올해는 중국과의 수교 40년이 되는 해지만 양측의 갈등으로 이렇다 할 축하행사는 열리지 않았고, 고위급 인사들의 상호방문도 무산됐다. 

 

외교실패가 ‘단명총리’를 낳는 악순환 속에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 가와무라 다카시(河村たかし) 나고야 시장 등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외교를 이끌어가는 형국이 조성됐다. 홍콩 활동가들의 센카쿠 상륙 사태는 이시하라 지사의 센카쿠 매입 발언이 원인을 제공했다. 도쿄도는 지난 17일 센카쿠 열도에 상륙을 신청한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애초부터 인기가 없었던 노다 총리도 보수세력이 작성한 외교매뉴얼 대로 움직이거나 오히려 강경태도를 보임으로써 취약한 정권기반을 보완하려고 움직였다. 노다 총리는 지난해 12월 교토(京都)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요구에 강하게 반발하며 오히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요구한 것이 ‘뜨거운 8월’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9일에는 한국정부가 외교백서에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표현한 것에 일본 외무성이 처음으로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은 동아시아 각국과의 관계악화를 계기로 대미의존을 더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자위대의 이와사키 시게루(岩崎茂) 통합막료장은 오는 23일 워싱턴에서 미국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과 센카쿠 등 일본의 도서방위 공조강화를 협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