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지 3일 만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위안소 설치에 착수했다. 일본의 작가 겸 역사가인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가 쓴 <소화사(昭和史)>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일본 내 치안 최고책임자인 내무성 경비국장이 8월18일 점령군을 위한 ‘서비스 걸’을 모집하라는 행정명령을 각 지방에 내려보냈다. 당시 재무관료로 후일 총리가 되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가 “(위안시설 조성에) 얼마나 필요한가”라고 묻자, 특수위안시설협회 간부가 “1억엔 정도”라고 답변했다. 이케다는 “1억엔으로 (나머지 여성들의) 순결이 지켜진다면 비싼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패전후 미군정이 실시되던 때 맥아더 사령관을 찾은 일본 히로히토 일왕
나라를 이끄는 핵심관료들이 점령군의 진주에 대비해 위안부 시설을 솔선해서 만드는 전대미문의 광경이다. 일화를 접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식이 왜 이리 안이한가’라는 궁금증이 조금은 풀렸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면 보편적 인권 차원의 문제의식은 애초부터 결여된 듯 보인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 전역으로 전선을 확대해가면서 더 많은 군인을 전장으로 내보냈고, 그에 비례해 위안부의 수를 늘렸다. 이 과정에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이 최근 밝힌 대로 ‘위협해 연행하거나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으로 속여’ 데려왔을 개연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민간인 업자가 모집 주체였고, 정부나 군이 강제적으로 연행했다는 문서상 증거가 없다”며 위안부 강제성을 부인하는 일본 우익인사들의 변명은 그 자체가 치졸하기도 하지만, 여성인권에 대한 저열한 인식이 두드러진다.
전후 67년이 경과했지만 일본의 여성인권에 대한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 지난해 참석한 어느 모임에서 겪은 일이다. 저녁을 겸한 토론모임에서 주문한 도시락이 오자 좌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성 회원이 움직여 도시락을 참석자들에게 분배했다. 그들보다 나이가 적은 일본인 남성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태연히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지인인 재일동포 여성은 “회사에서 남자 직원들을 위해 커피를 타준다”며 “일본에서는 여직원들이 이런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일본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외무성 전직 관료인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지적한 대로 위안부 문제는 이미 국제적인 현안이 됐다. 전쟁시기에 도입된 불가피한 제도라는 설명은 국제사회에 통용되지 않는다. 일본은 여성을 중시하지 않는 야만국으로 간주되고, 미·일 동맹에도 균열이 생길지 모른다는 그의 경고는 심상치 않다.
하지만 한·일 갈등의 광풍이 가라앉자 양국 모두 위안부 문제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달 민주당과 자민당의 대표 및 총재 선거가 마무리되면서 일본에선 득표를 위한 ‘우경화 선풍’도 가라앉은 데다, 한국 정부도 양국 갈등 봉합을 위해 문제해결에 나서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양국이 평행선을 달리게 되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평생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고,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영구미제’로 남게 된다. 미제사건을 떠안은 양국의 미래가 결코 밝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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