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카쿠 열도/로이터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지난 17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 지사와 당을 합치기로 하면서 그간 주장해온 ‘탈원전’ 정책을 공약에서 제외한 것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이는 다음달 16일 열리는 일본 중의원(하원) 총선에서 탈원전 이슈가 더 이상 승패를 가르는 쟁점이 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계산 빠른 하시모토는 탈원전에 매달리는 것보다 영토문제 등에 초강경 태도를 보이는 이시하라와 손잡는 것이 총선득표에 더 플러스가 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 틀림없다.
올해의 일본을 되돌아보면 묘하게도 탈원전 이슈가 표출된 뒤 영토문제에 불거지곤 했다. 우선 이시하라가 지난 4월16일(현지시간)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초청으로 방미해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 “민간인이 소유한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도쿄도가 사들여 관리하겠다”며 중·일간 영토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대표적인 원전 찬성론자이기도 한 이시하라의 발언이 나오기 사흘전인 4월13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각료회의를 열어 간사이(關西)전력의 오이(大飯)원전 2기를 재가동하기로 하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설득에 나서기로 했다.
이시하라의 센카쿠 매입을 저지하겠다는 명목으로 노다 총리가 ‘센카쿠 국유화’ 방침을 꺼낸 것은 지난 7월7일. 20만명(주최측 추산)에 달하는 시민들이 총리관저 일대에 운집해 ‘원전 재가동반대’를 외쳤던 6월29일로부터 8일 뒤다. ‘수국혁명’이라는 이름까지 붙을 정도로 뜨거웠던 여론에도 아랑곳 없이 일본 정부는 7월1일 오이 원전 3호기의 재가동을 강행했다.
이시하라와 노다의 주고받기가 중국을 자극하면서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9월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영토갈등이 한창이던 9월 미국은 일본 정부가 추진하려던 ‘2030년대 원전제로’ 방안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9월14일 열린 각료회의에서는 ‘2030년 제로’ 등 핵심내용을 빼버린 에너지 정책을 의결했다. ‘탈원전’ 이슈가 영토문제로 희석된 상황을 단순히 우연으로 봐야 할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작용으로 봐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탈원전 이슈는 노다 총리가 내건 환태평양경제협정(TPP) 참가 여부와 영토문제를 비롯한 외교·안보정책, 소비세 증세문제 등과 함께 ‘쟁점 중 하나’로 전락해 버렸다. 영토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보수 자민당은 탈원전에 반대함에도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민주당은 아직도 탈원전을 이야기하지만 유권자들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탈원전을 내건 국민생활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는 ‘구태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힘을 쓰지 못한다. 원전 즉시 철폐를 외치는 공산당은 주류 언론들이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는 아직도 시간당 1000만베크렐(㏃)의 방사성물질이 방출되고 있다. 녹아내린 핵연료가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핵연료를 식히느라 매일 500t의 오염수가 새로 생겨나고 있지만 처리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원전에서 400㎞가량 떨어진 시즈오카(靜岡)현에서 재배된 차잎에는 세슘이 묻어있고, 오염 버섯들이 10개현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후쿠시마 현에 사는 10대 소녀는 갑상샘 암 판정을 받았다.
도쿄의 총리관저 앞에는 ‘원전재가동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이 매주 금요일 모이고 있지만 기세가 한풀 꺾였고 언론들도 관심을 접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작고 안전한 나라’ 일본을 꿈꾸던 이들은 낙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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