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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자주빛 머리칼의 까칠한 경제학자, 하마 노리코

서의동 2012. 9. 29. 17:12


도쿄시내에 있는 도시샤대 도쿄오피스에서 만난 하마 노리코 교수/by 서의동



ㆍ“성장 집착 말고 축적한 부 잘 분배… 일본, 우아하고 아름답게 늙어가야”


“일본은 우아하게 늙어가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마 노리코(浜矩子·60) 도시샤(同志社)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불온한’ 학자다. 일본 정부와 게이단렌(經團連·경제단체연합회로 우리나라 전경련에 해당), 대기업이 들으면 펄쩍 뛸 ‘탈성장론’을 꾸준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진단은 상당한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다. 


하마 교수가 주장하는 요체는 이런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보유국이며 풍부한 자산과 인프라를 갖춘 경제이기 때문에 성장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성장에 집착하다 보면 신흥국들과 수출경쟁을 벌이느라 근로자들은 저임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수불황이 지속된다. 대신 해외투자로 벌어들인 부를 나눠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경제와 지역공동체의 내실화에 힘을 쏟자.”


그의 주장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던 일본의 ‘좋았던 시절’을 재현해 ‘대국(大國)’으로 부활하자는 관료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다. 하지만 중소기업인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탈성장을 이야기하면 표 날아간다”면서도 동조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일본이 ‘대국’ 강박증을 털고 ‘우아한 작은 나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그의 제언은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를 살아가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공감을 키워가고 있다. 


지난 24일 도쿄 시내 도시샤대 사무실에서 만난 하마 교수는 “일본은 하나의 거대세포를 더 키우기보다는 세포분열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극주의(一極主義)’ 경제를 탈피해 지역경제와 지역공동체에 활력을 줘야 할 시기라는 뜻이다.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 ‘일본보다 더 효율적인 일본시스템’을 구축했지만 하반신(사회적 토대)이 약해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 지난해 출간하신 <성숙일본, 경제성장은 더 이상 필요없다>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책에서 일본 경제를 평가하는 척도로 국내총생산(GDP)보다 국민총생산(GNP) 개념을 제시하셨던데요. 


“지금의 일본 경제는 국내의 생산활동에서 생겨나는 부가가치보다 일본인이 국내외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의 규모가 훨씬 큽니다. 전 지구를 무대로 하는 일본 국민의 활동이 부를 창출하는 구조가 되면서, 일본의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수출해 경제성장을 하는 ‘무역입국’ 대신 ‘자본입국’ 또는 ‘투자입국’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일본은 무역수지가 2조5000억엔 적자를 기록했지만 경상수지는 9조6000억엔이 흑자였다. 해외투자로 벌어들인 이자 및 배당 등 소득수지가 무역적자를 상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GDP에 소득수지를 합한 국민총소득(GNI)으로 경제를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작 문제는 이렇게 경제구조가 바뀌고 있는 실상을 관료들과 기성 경제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하마 교수는 지적한다. 디지털TV 등 가전산업의 몰락에서 드러나듯, 엔화강세에 따른 가격경쟁력 약화로 종래의 성장방식이 한계에 봉착해 있지만 게이단렌은 아직도 ‘싸고 좋은 물건을 대량생산해 세계시장에 팔자’고 한다. 이 부작용은 젊은이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제조업이 해외에서 승부하려면 가격경쟁력이 있어야 하고, 결국 임금을 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저임금에 시달리며 결혼을 엄두도 못내고 가급적 돈을 안쓰려 들면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내수가 줄면 기업들은 다시 판로를 해외에서 찾으려 하게 되고,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임금을 깎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앞의 설명은 일본 젊은이들이 ‘초식화’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제조업으로 다시 꽃을 피워보자는 발상이 자기 목을 스스로 죄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대안은 뭔가. 하마 교수는 ‘오이라쿠(老樂·안락하게 늙어가자)’라고 말한다. 


“오이라쿠는 성장의 가속페달을 힘겹게 밟기보다 그간 쌓아올린 풍부한 부를 잘 분배해서 즐겁고 한가롭게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경제가 충분히 성숙해 있으니 풍요함을 누릴 수 있는 경제·사회 구조를 잘 만들면 모두가 즐거운 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사회 시스템은 종전 후 부흥성장 시기에 어울리는 것이어서 성숙경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일본 사회의 답답함이나 불만이 이런 ‘미스매치’ 때문인 것이죠.”


하마 교수가 대안으로 구상하는 것은 ‘내적 세포분열’이다. 고도성장기의 일본은 한 개의 세포를 거대하게 키워냈지만, 앞으로는 세포분열에 공을 들여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수도권 중심의 일극주의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지역공동체에 활력을 키워가면 자연스럽게 재분배와 내수 활성화로 연결된다. 


“일본 정부가 막대한 국가채무로 지역에 돈을 돌리기 어렵다면 차라리 ‘지역통화’를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역이 독자적으로 통화를 갖게 되면 지역의 기업은 지역통화로 임금을 주고, 노동자는 지역통화로 물건을 사는 식으로 ‘엔화’ 없이 지역경제를 돌릴 수 있는 것이죠.”


지역통화는 세계적인 불황이던 1930년대 유럽 각 지역에서 도입돼 해당 경제활성화에 상당한 효과를 본 적이 있다.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橋下徹)의 말대로 소비세(부가가치세)를 지방세로 돌리는 방안도 대안 중 하나다. 물론 부의 재분배를 위한 세제개혁도 필요하다. 


그는 성장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굳이 원자력발전소를 재가동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일부러 작은 경제를 지향할 필요도 없어요. 무리하지 않는 정도의 성장이라면 원전을 가동하지 않고도 경제가 돌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더구나 인구도 줄어들고 있고요. 물론 ‘옛날 영광이여, 다시 한번’ 식이라면 원전이 필요하겠지만요.”


하마 교수는 한국의 산업정책에 대해서는 일단 호평했다. “한국 기업들은 중복투자가 적고, 정책주도로 영역구분이 잘 돼 있는 점이 부럽습니다. 삼성과 현대 등 대기업이 경합을 피하고 각자의 영역을 갖고 있어 일본처럼 서로 잡아먹는 식의 경쟁이 없는 점은 평가할 만합니다.” 과거 관료들이 산업정책을 주도하면서 전후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일본형 모델을 한국이 일본 이상으로 효율적으로 구축했다는 설명이다. 


정작 문제는 한국 경제가 다음 단계로 무리없이 넘어갈 수 있는지 여부라고 하마 교수는 지적했다. “한국 경제의 작동방식이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고, 어느 단계에 가서는 하반신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기에 민주적인 해법이 제대로 나올 것인지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정책이 사회 문제에 얼마나 감수성을 갖고 대응할 수 있느냐도 중요해집니다.”


지난해 출간한 <성숙일본>은 결국 1쇄에 그쳤다. 아직은 ‘광야의 외침’에 불과한 셈이다. “논리적으로는 몰라도 감성적으로는 성장 이야기가 먹힐 수밖에 없지요. 발상의 전환에는 불안도 따르고 용기도 필요하겠지요.” 더구나 일본은 갈수록 우경화되고 있다. ‘아름답고 우아하게 늙어가는’ 이웃 일본의 모습을 보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마 노리코 교수의 트레이드 마크는 보랏빛으로 염색한 머리와 까칠한 표정이다. 외관뿐 아니라 이력도 평균적인 일본인과 상당히 다르다.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귀국해 히토쓰바시(一橋)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쓰비시종합연구소에 입사했다. 여성은 연구원이 될 수 없는 규정 탓에 차 심부름을 해야 하는 일반직으로 입사했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런던사무소장까지 올랐다. 

전공은 국제경제 분야지만 TV 토론 등에 자주 등장하면서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발언한다. 일본의 정치정세를 묻자 “정치인들이 자기 살길만 찾다보니 이에 질린 사람들이 하시모토 도루 같은 이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고, 그가 중앙정치에서 주도권을 쥐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하시모토는 ‘가짜 영웅’이라고 단언했다. “원전 재가동을 반대하는 시민운동이 가짜 영웅에게 열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도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