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책선거를 상징해온 ‘매니페스토’가 다음달 16일 중의원 선거(총선)를 앞둔 일본 정치권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매니페스토는 이행가능성, 예산확보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정책공약을 가리키지만 민주당이 이를 내세워 2009년 정권교체에 성공한 뒤 이행하지 못하고 3년 만에 몰락 위기에 처하자 ‘지키지 못할 공약’의 동의어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58) 자민당 총재는 지난 22일 “우리 당의 공약은 매니페스토가 아니라 ‘정권공약’”이라며 “민주당 정권 이후 매니페스토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자민당은 민주당 정권에 대해 그간 “매니페스토로 사기를 쳤다”며 공세를 펴왔던 만큼 스스로도 조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실제로 자민당이 지난 21일 발표한 ‘일본을 되찾는다’는 제목의 공약집에는 그간 아베 총재가 무제한 금융완화를 위해 일본은행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혀온 것과 달리 ‘법개정을 시야에 (넣겠다)’고 표현하는 데 그쳤으며 국회의원 정원 축소도 수치 목표를 아예 뺐다.
공명당이 지난 17일 발표한 ‘일본재건’ 공약집 표지에는 ‘매니페스토’ 글귀가 옅은 색으로 인쇄돼 있으며, 그나마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대표 얼굴 사진으로 절반쯤 가려졌다. 야마구치 대표는 “매니페스토에 대한 불신감이 커진 만큼 앞으론 매니페스토를 가급적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와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이끄는 일본유신회도 오는 24일 발표할 공약집 제목을 매니페스토 대신 ‘골격 2013~2016’으로 정했다.
매니페스토가 실종된 것과 함께 각 정당이 주요 현안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거나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돋보이면서 유권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하시모토 일본유신회 대표대행은 이시하라의 태양당과 합당하면서 ‘탈원전’ 공약을 뺐다가 비판이 일자 다시 ‘40년 뒤 원전폐로’를 집어넣기로 했다. 환태평양경제협정(TPP)에 대해서도 하시모토는 당초 참여방침을 주장해왔다가 이시하라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보 후퇴했다.
자민당도 공약에서 원전정책에 대해 그동안 주장했던 ‘원전유지’ 대신 ‘향후 3년 내에 재가동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기술했고, 환태평양경제협정에 대해서도 ‘성역없는 관세철폐를 전제로 할 경우 교섭 참가에 반대한다’고 조건을 다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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