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네팔의 오지인 라베 마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사위가 칠흑같은 늦은 밤에 마을주민과 아이들이 겨울 한기에도 아랑곳 없이 마을 공터에서 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멀리서 지프의 불빛이 보이자 들뜨기 시작하더니 차에서 내리는 20대 여성에게 일제히 달려듭니다. 산골마을 아이들이 공부할 학교를 건립해준 이 여성은 형언키 어려운 행복감에 휩싸입니다.
북 산골서 ‘귀국자 자녀’로 출생
10년 전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 정착한 다카야스 교코(高安京子·29)를 지난 29일 도쿄 시내에서 만났습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다카댜스는 네팔을 방문했을 당시를 회상하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아이들이 일제히 ‘교코, 교코’라고 소리치며 팔에 매달리는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까’ 하고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학교 벽에 내 사진과 이름을 붙여놨더군요. 아이들이 영어로 ‘나는 당신이 지어준 학교의 학생’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26년간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카야스의 인생역정은 웬만한 드라마 이상으로 파란만장합니다.
북한에서도 가장 뱀이 많다는 함경북도의 어느 산골에서 태어난 다카야스는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하고 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자랐습니다. 스포츠에 소질이 있어 중학교 때는 함경북도 역도대회에서 우승했고, 태권도도 수준급이지만 출신성분의 벽을 넘지 못해 희망을 접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인 할아버지와 일본인인 할머니가 북송사업으로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한 ‘귀국자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몰래 중국 다녀온 뒤 탈북 시도
15살 때 어머니가 어느 사건에 연루돼 당국에 체포된 뒤로 형편이 기울자 생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척이 있는 중국을 몰래 다녀온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중국에 직접 가보니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 놀랐어요. 불빛이 휘황찬란하던 중국 밤거리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더군요.”
이후 2차례 탈북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우여곡절 끝에 19세 되던 해 사촌오빠와 함께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탈북 후 일본행을 치밀하게 준비해온 사촌오빠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적십자사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2주 만에 일본 당국과 연락이 닿았고, 일본의 지원단체와 연락을 취하며 숨어 지내다 1년 뒤 나리타(成田)공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도쿄에 도착한 뒤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민단에 우리를 인계했고, 민단의 수소문으로 초등학교 교사인 일본인 독지가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분의 성을 받아 다카야스가 됐지요.”
일본에 온지 3년쯤 지나면서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TV에서 네팔에서 산골 어린이들의 학교건립 지원사업을 하는 가키미 카즈마사(74)의 사연을 접하게 됐습니다.
“고생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 지인의 소개로 그분을 만났습니다. ‘아이들이 공부할 학교가 부족하다. 15만엔(약 160만원)이면 방 한칸 크기의 학교교사를 지을 수 있다. 거기서 몇 십명 공부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지원하겠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2010년 네팔을 방문해 아이들과 찍은 사진. 다카야스 제공
허리띠 졸라 네팔 산골아이들 돕기 시작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비와 고교 학비를 대는 처지이지만 ‘허리띠를 조르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해 50만엔을 내기로 약속했습니다. 가키미가 네팔에서 1년에 1~2차례 일본에 올 때마다 어렵게 마련한 돈을 건넸습니다. 2008년부터 누계로 150만엔(약 1600만원)을 지원했고, 현재 150명의 어린이들이 다카야스가 지은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벽돌로 지은 교사에 올해는 콘크리트를 바르고, 흑판과 의자를 보냈습니다. 내년엔 컴퓨터 2대를 보낼 계획입니다.
다카야스가 지원하는 네팔의 라베 마을은 해발 2500m에 자리잡은 산촌으로,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산기슭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야 하는 이 산골아이들을 보면 세 살 때부터 우물에 물을 길으러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비행기와 차로 꼬박 하루가 걸가는 곳이라 찾아가기 쉽지 않지만 “돈은 필요 없으니 다음에도 꼭 오라”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가끔 우울할 때 네팔에서 찍어놓은 비디오를 보면 기분이 나아집니다. 내년 3월에 또 갈 계획인데 벌써부터 설레네요.”
다카야스는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19년이 헛된 나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생도 많았고 자유도 없었지만 북한에서 자라며 겪은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보통의 일본인들처럼 자라왔다면 네팔 어린이들을 돕는 일은 아마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북에서의 18년은 나를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쿄시내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한 다카야스.
일본선 탈북자 정착 지원제도 없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는 250여명(추정)으로, 1960~70년대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간 재일동포의 자녀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의 ‘하나원’이나 여타 선진국처럼 탈북자의 정착을 돕는 체제가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에 연고가 있고 일본행을 희망하는 이들을 일본으로 데려오는 것은 지원하지만, 일본에 도착하면 ‘임무끝’입니다. 탈북자들을 받아들인다면 일본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다카야스의 일본어는 수준급이지만 억양이 조금 어색합니다. 길게 대화하면 ‘어딘가 다르다’고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주 친하지 않는 한 주위에 탈북자임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대개는 재일코리안이라고 둘러댑니다. 고교 때 영어연수로 반 년간 영국에 유학했을 때 만난 한국인 학생과 친해졌는데 그에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일본인 납치문제나 미사일 실험으로 대북여론이 좋지 않은 사정도 아직 신경쓰이기 때문입니다.
다카야스의 사연은 지난 8월 처음 실명으로 일본의 일간지 기사에 실렸습니다. 지난해 일본국적을 취득했고, 최근 은행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하는 등 기반이 잡혀가던 시점이어서 괜찮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2011년 겨울 서울, 지난해 여름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서울의 첫 인상은 도쿄와 다를 게 없어 보였는데 숙소인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아 조선에 왔구나’라는 느낌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층건물은 많은데 비해 전통 건축물은 거의 없어 약간 실망스럽더군요. 부산에서는 시장 아주머니들의 시끌벅적함에 한국다운 정겨움을 느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도쿄 시내 대학에 재학 중인 다카야스는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쉽지 않겠지만 유엔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유엔이라면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새장’(북한)에서 빠져나왔으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어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고픈 기분도 듭니다.”
(다카야스에게 "만약 누가 당신의 조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고향은 북한이고 지금은 일본에 살고 있으니..." 한참 갸웃거리며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긴 답변할 필요도 없는 바보같은 질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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